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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alna Feb 27. 2023

신입사원

#입사동기들에게 #보냅니다 #사랑을!

졸업식을 마치며 후련한 눈으로 한 녀석이 물었다.

선생님 이제 방학인데 뭐 하실 거예요?

한숨이 절로 났다. 이삿짐, 인수인계, 청소, 송별회, 새인사… 개연성 없는 단어들이  순식간에 둥둥 떠다니며 딱 머리가 아팠다.

답을 기다리던 아이의 얼굴에 잔뜩 떠오른 의아함을 바라보며 가볍게 대꾸해 주었다.  취업.

뜻을 되짚던 녀석이 등뒤에서 큰 소리로 외쳤다.

선생님! 학교 관둬요?!?!?




신입사원







졸업 후 바로 임용이 된 나는 다른 직종을 전혀 경험해보지 못했지만

그 어떤 분야, 어떤 회사라도 처음 커리어를 시작한 신입사원의 모습은 크게 다르지 않을 것 같다.

빳빳하게 신경 쓴 옷차림, 바짝 긴장한 얼굴, 어떤 말에도 넵! 알겠습니다! 를 반복하는 태도.



내 신입사원 시절, 그러니까 신규 교사시절도 비슷했다.

한 달 전만 해도 추레한 고시생이었던 나는

갑자기 한 학급의 담임교사이자 건실한 공무원이 되어야 했는데

레벨 업하면 전직도 시켜주고 외형도 변하는 rpg게임 속 캐릭터도 아니고, 임명장 좀 받았다고 단시간에 능숙한 교사가 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도무지 단 하나도 쉽게 넘어갈 수 있는 일이 없고  모르는 것 투성이었다.

전달사항은 뭘 말하는 건지, 개학하기 전에 뭘 준비해둬야 하는 건지, 인수인계받은 업무는 어떻게 하는 거고 학급 관리는 어떻게 해야 하며 공문 작성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중 제일 난처한 것은 ‘내가 뭘 모르는지 모른다’는 거였다.

학교는 바쁘게 돌아가고 동학년 선생님들은 무언가 분주하고 당장 다음 주부터 애들은 온다는데

내가 준비가 되긴 한 건지, 아니라면 내가 뭘 해야 하는지 조차 알 수가 없었다.



게다가 신규 시절엔 함께 일하는 선생님들이 참 어렵게만 느껴졌다.  

말 한마디, 질문 한 번이 쉽지가 않았다. 내가 오늘 인사를 제대로 했는지, 동료선생님들 말씀에 무례하지 않게 대답했는지

업무 협조를 부탁하는 태도는 이 정도면 적합한지,  늘 나 자신을 검열하고 조심한달까.


그래서 번거로운 일엔 습관적으로 ‘제가 할게요!‘를 외치게 되었다. 회식이라도 하면 집착적으로 수저를 놓고 물을 따르고 

가고 싶지 않은 업무 회의나 연수에 차출되어 가더라도 불평한마디 하지 못했다. 신입이라 내가 당연히 해야 하는 줄로만 알았으니까.



그 시절 나는 팽팽하게 당겨진 줄 같았다. 잠깐도 긴장을 내려놓지 못해서 늘 어깨가 아팠고, 퇴근 후엔 죽은 듯이 잠들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아무도 나에게 ‘그렇게까지’를 바라지 않았고 그럴 필요도 없었는데 말이다.





신규 시절에 그래도 위안이 되었던 걸 찾으라면 바로 나의 발령동기들이다.

나는 운 좋게도 몇몇 ‘언니들’과 함께 발령 나서 같은 학교에서 함께 근무할 수 있었는데

그 존재만으로도 얼마나 위로가 되었는지 모른다.


내가 모르는 걸 똑같이 모르는 사람이 있고, 내 하소연과 푸념을 걱정 없이 터놓을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

난처한 일을 함께 의논해 주고 내가 겪는 어려움을 가장 비슷하게나마 느끼는 사람이 있다는 것


우리는 매일 모여 각자의 하루를 쏟아내었다.

유난히 속을 썩이는 우리 반 학생 때문에 울적하고, 한 학부모님의 전화에 뭐라 답할지 몰라 난처하다는 이야기들.

중요문서를 빠뜨려 뒤늦게 수습했다거나, 교장선생님께 결재받으러 가는 게 겁난다는.

세상의 모든 ‘신입사원’들이 겪어봤음직한 일들.

술도 잘 못하면서 학교 인근의 술집에 모여, 어묵탕과 계란말이를 시켜놓고 온갖 이야기를 나누던 그 시간이야 말로 사회초년생인 나에게 커다란 위안이었다.


다 함께 첫 학교를 떠날 땐,  다시는 직장에서 이만큼 소중하고 가까운 사람들을 만나진 못하리라, 엉엉 울었다.





그런데 나는 올해 또 신입사원이다. 새로운 학교로 가게 되었기 때문이다.

교사는 한 학교에 익숙해져 좀 여유를 찾아볼까… 하면 새로운 학교로 가야 하니, 몇 해 주기로 신입사원을 반복하고 있는 것 같다.

연차가 쌓이고 경험이 늘어도 새 학교로 옮기는 순간

스물넷, 신규 시절의 내가 된다.



학교는 멀리서 보면 비슷해도, 들여다보면 개개의 다른 회사나 다름이 없다.

그래서 1년 차 교사이든 10년 차 교사이든 제로베이스에서 시작한다.

새로운 업무, 새로운 학년, 지문 등록도 새로, 계좌 등록도 새로.

복사기 위치나 급식소 가는 길, 분리수거 방식이나 종이 울리는 시간까지 모든 것을 다시 배우고 외우려고 애쓴다.



내 경우 올해는 꽤 규모가 큰 학교로 전입하게 되었는데

첫날엔 내 교실을 찾는데에 한참, 둘째 날은 내 신발장을 찾는데 한참.( 신발을 들고 어리둥절한 나를 무려 교장선생님께서 1학년 대하듯 안내해 주셨다)

셋째 날엔 부족한 책상 하나를 찾아 채워 넣는데 반나절이 걸렸다.



우여곡절 끝에 책상 개수를 맞추고 청소를 시작하려는데 삐죽, 성질이 치솟는 거다.

이놈의 학교, 경력이 쌓이면 뭘 한담. 이렇게 신입사원을 평생 반복하는 직업이 어디 있다고!

진짜 신규시절엔 10년쯤 뒤의 내가 능숙하게 새 학기를 준비하는 ‘경력직’이 되어있을 줄 알았는데

정작 지금의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무지렁이가 된 것 같다. 아마 이 학교에 쭉 다녀온 우리 반 학생들보다도 훨씬 모를 거다.



게다가 경력이 쌓이면 쌓일수록 더 ‘신입사원’이 되는 게 무섭다.

어릴 땐  모든 걸 배워낼 체력과 기억력이라도 좋았다. 몇 년 차라는 딱지가 없어 ‘나’라는 교사에 대한 기대는 적었다.

그런데 지금은 ‘이 정도는 할 연차’라는 꼬리표는 대문짝만 하게 달린 대신,

나의 hp와 mp는 현저히 줄어들었으니. 두렵기 짝이 없다.





한숨이 나 청소를 관두고 모니터 앞에 앉았더니 잔뜩 쌓인 쪽지함이 짜증을 돋궜다.

우리 반에 편성된 학생들을 당장 ‘알림장앱’에 가입시켜야 한단다.

마지막까지 가입하지 않는 학생에게 전화를 아무리 걸어도 받지 않는다.

도대체 이걸 누구에게 물어 어떻게 해결해야 하나, 얼마나 걸릴 건가.  

문자 그대로 화딱지가 나는 것 같아 마우스만 클릭 거리는데 전화가 울렸다.



전 학교에서 함께 새 학교로 오게 된 s 선생님이다.

받았던 명단 중 일부 학생 번호에 오류가 있으니 어느 어느 선생님께 연락해 보면 된다는 말.

전화를 끊으니 부글부글 끓어 넘치려던 내 온도가 내려간다. 훅 오르던 열을 식히는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는 기분.

딱 가로막혔던걸 어쩜 이렇게 바로 알고 알려주시지?  통한 것 같아 유쾌하기까지 하다.

               


이번에 나는 운 좋게도 함께 근무하던 선생님들 중 무려 다섯 분과 같은 학교로 이동하게 되었다.

나이도, 경력도 모두 다르고 심지어 나보다 훨씬 선배님들이시지만, 그래도 말하자면 입사동기인셈이다.



나의 다채로운 입사동기들은 어찌나 유능한지, 매번 내가 어디선가 가로막힐 때면 나타나 나를 구제해 주신다.

안내장에 수정사항이 많네… 하고 있었더니 ‘수정본을 공유합니다’ 하고 쪽지가 날아오고

교실 캐비닛이 고장 났다 말하니 행정실 어디 어디로 문의하면 바로 해결된다고 알려주신다.

우연히 새 학교에서 하게 된 강의에 긴장을 삼켰더니 '우리 애 잘한다!’는 표정의 응원이 돌아오고

새로 맡게 된 업무에 낯설어하니 필요할 때 부르라는 답이 들려온다.

그뿐이랴.

도시락이 맛없다 투덜거렸더니 오늘 점심은 나가서 먹자! 하시는가 하면

오래 묵은 교실 먼지를 털어내고 콜록거리고 있을 때 커피 한잔하자- 하는 전화가 온다.



든든하다.

내가 모르는 걸 똑같이 모르는 사람이 있고, 내 하소연과 푸념을 걱정 없이 터놓을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난처한 일을 함께 의논해 주고, 내가 겪는 어려움을 비슷하게나마 느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그리고 무엇보다 함께 웃고 떠들고 나눌 수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 든든하고 상쾌하다.



입사동기들 덕분에 활시위처럼 위태롭게 당겨진 나를 다시 다독거려 일하게 된다.

쿵, 하고 깨달아지는 게 있다.


아, 사람이 사람 덕분에 버틴다는 게,  아무리 직장이라도 사람이 제일 중요하다는 게,  이런 거였구나.

내 미간의 주름을 슬며시 눌러주고 짜증 난 열기를 내려주는 게 내 주변의 고마운 동료들이구나.

진짜 신입이던 시절에도, 지금도.

어쩐지 꼭 게임에는 꼭 경험치를 잔뜩 주는 파티퀘스트가 있더라니.

 


어느 저녁자리에서 말했듯이 정말 ' 함께해 주셔서 너무 감사하다.'  온몸으로, 마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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