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무한 무안

꽃은 열매를 남기고

무한 무안 1

by 지상

그렇지, 연꽃을 보러 가는 날에는 비가 와야 제격이지. 연잎 중심으로 또그르르 빗물이 고이면 무게 중심을 잃고 일제히 고개를 떨구는 연잎들의 풍경을 어디 만나기가 쉬운가. 아침 6시 반. 옥수수 한 개, 계란 한 개를 싸들고 무안으로 간다. 나주에서 남악으로 이어진 49번 지방도를 타고 가다 영산강을 막 넘어 이쯤인가 싶을 때 좌회전으로 2킬로 미터 정도 들어가다 보면 문득 펼쳐지는 곳. 원래 이리 가까웠던가 싶어 다시 한번 확인을 해야 하는 곳. 영산강을 지척에 둔 그곳에 회산 백련지가 있다. 비가 잠시 멈춘 사이 키 큰 참깨들에 묻혀 깨를 거두는 어르신들의 삶을 지나 튼실하게 고구마가 익어가는 밭도 지나 푸르게 벼가 자라고 있는 드넓은 들을 지나 문득.

KakaoTalk_20220808_115412546_07.jpg 연꽃방죽 저쪽



수년 전에는 광주에서 목포로 가는 1번 국도를 타고 가다 무안읍에 당도하기 직전에 지방도로로 한참을 가야만 그곳에 닿았다. 그렇지 않고서는 닿을 수 없다는 듯 은밀하고 적요하게 무안의 깊은 곳에 자리하고 있었다. 그리 드는 길이 좋아서, 그리 운치 있게 늘씬한 구불길이 좋아서 일부러 찾아다니곤 했다. 어쩌면 처음 그곳을 만났던 때가 그렇게 은밀하지 않았다면, 구불구불한 그 길 위에서 나를 벼리고 위로할 수 없었다면, 지금처럼 빤하게 뻔했다면 나는 그곳과의 만남을 이리 오래도록 이어오지 못했을 것이다.


아는 사람 하나 없는 무안, 내게는 물 빠진 갯벌이, 연꽃이, 언덕진 황토밭이 연고였다. 퇴근하다가 갯벌로 가라앉는 노을이 보고 싶어지면 무안으로 갔다. 비가 오는 날, 바람이 부는 날 갑자기 어딘가에 가고 싶어지면 무안으로 차를 몰았다. 왜일까? 왜 나는 무안으로 가는 것일까. 거기엔 정리되지 않은 편안함이 있었다. 흐트러진 풍경이 흐트러진 나를 품어주는 곳, 연기가 피어오르는 저녁이면 황토 언덕이 붉게 물드는 곳, 불편함과 동행하는 사람들이 묵묵히 생을 짓는 곳. 그 어디쯤에선가 나는 차를 세우고 마음을 누이곤 했다.



연꽃방죽은 축제가 끝나고 꽃은 이미 졌으며 막 해산한 듯한 고요한 풍경이 비에 젖어가고 있었다. 모든 꽃들은 열매를 낳는 법. 연꽃 그 후 연밥을 품은 연통들이 갈색으로 익어가고 있었다. 주변으로는 왜왜련, 황관, 백천아, 고랑소홍, 상사홍, 만수홍, 안두홍, 여황, 금광, 백매, 황모단련, 소명성, 불자련, 소쇄연.... 한아름 항아리 분에 이름을 달리 한 수련들이 즐비하다. 내 눈에는 같은 잎인데 이름은 다 다르다. 이렇게 많은 종류가 있다는 것이 놀랍다. 다 알아보는 눈이 있기 때문이리라. 그래서 일거다. 이처럼 푸르름에 머물러 있을 수 있는 것은. 얼마 지나지 않아 이 푸름이 숭숭 뚫리고 쇠한 갈색의 줄기들만이 뿌리를 지킬 것이다. 그때도 오마고, 마지막 이슬을 털어내고 푸르름을 함께 보내자고 연밥 같은 단단한 약속을 한다.  


연꽃이 이토록 아름다운 건 방죽 때문일 거라고 생각해본다. 연꽃 호수도 아니고 연꽃 저수지도 아니고 연꽃정원도 아닌 연꽃방죽. ‘방죽’이라는 큰언니 같은 소박하고 헌신적이며 수더분한 품으로 인해 연꽃이 마음 놓고 더 아름답게 피는 것이라고. 초등학교 5, 6학년 무렵이었던가. 학교가 끝나면 손바닥만 한 연꽃방죽을 끼고 있는 친구 동네에 가서 손에 닿는 연통을 꺾다 아예 방죽으로 들어가 연밥을 모으곤 했다. 그 연밥으로 뭘 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지만 해질 무렵 진흙으로 뒤덮인 채 집에 들어서면 어머니의 욕설이 먼저 튀어나오곤 했다. 호랭이가물어가다못다물어갈년. 어머니는 저 연꽃처럼 스러지고 이젠 방죽 같은 큰언니에게 나를 심어 두고 산다.

KakaoTalk_20220808_115412546_06.jpg 꽃의 그 후



“회산 백련지는 면적이 10만 평으로 동양 최대의 규모다. 이곳의 백련은 생육 기간이 길고 잎, 꽃, 뿌리, 줄기가 다른 곳의 백련보다 크고 긴 것이 특징이며 꽃의 처음은 연한 분홍이나 점점 순백이 되어간다. 그리고 꽃수가 적다.” ‘꽃수가 적다’는 설명글에서 눈이 멈춘다. 꽃대를 밀어 올리는 힘은 아마도 적은 꽃수에서 나오는 것일까. 말수가 적은 사람처럼 속사연을 품고 있을 것만 같다. 마음이 더 머문다.

그런 연꽃의 사연을 안다는 듯 방죽 주변으로는 느티나무, 수양버들, 천리향, 동백나무, 구골나무, 배롱나무, 능소화들이 초록초록 연잎들과 동행한다. 꽃의 무게를 이기지 못한 수국도 풍성한 꽃대궁을 지면에 놓아두고 있다. 그들을 따라 방죽 둘레로 조성되어 있는 3킬로미터 테크 길을 사부작사부작 걷는다. 아직 한두 송이 때 늦은 연꽃들이 피어있고 꽃잎을 떨어뜨리기 시작한 봉우리들을 지난다. 어디쯤을 지나도 한 자리인 듯 곁에는 연잎들이다. 살짝 연잎을 열고 방죽을 다져 만들어 놓은 길을 따라 들어가니 키 작은 나도 연잎에 묻혀 사라진다. 잠시 품 넓은 연잎이 되어 푸르게 서 본다.

KakaoTalk_20220808_115412546_29.jpg 마지막 꽃잎


그러고 보면 둥그런 둘레길은 참 안전하다. 되돌아와야 한다는 지난함이 없이 한 바퀴 두 바퀴 완성감을 주기도 한다. 그래서 어떤 길이든 같은 길을 되돌아 시작점으로 오는 것보다는 에두른 길을 돌아 시작점으로 도착하는 길이 편안하다. 아무리 먼 길이라도 마음이 뿌듯한 이유다. 방죽을 마주하여 자리한 정자에 앉아 속내를 들어 내 보기도 하고 누워보기도 한다.

아, 이 글을 정리하고 있는 지금 무안이 당긴다. 노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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