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시도 채 되기 전에 사람들이 배낭을 싸기 시작했다. 일어나야 할 시간이기도 했지만 수십 명이 머무르는 오픈형 숙소라 어차피 더 자긴 틀렸다. 이왕 잘 수없으니 일찍 출발하기 위해 배낭을 정리하는데 모자와 배낭 커버가 보이지 않았다. 젖은 모자를 분명 2층 침대 사다리에 묶어 두었고 배낭 커버도 배낭에 연결되어 있었으니 일부러 분리하지 않으면 이리 감쪽같이 사라질 수가 없었다. 기웃기웃 찾기 시작했다. 다행히 모자는 옷장 안에, 배낭 커버는 순례자 사무실에 얌전히 놓여 있었다. 등록을 기다리며 잠시 사무실 앞에 놓았던 배낭을 가져올 때 헐거워진 버클이 커버를 떨어트렸던 것이다.
그 잠깐 동안의 몹쓸 의심이 신뢰의 마음도 잃게 했다. 경솔하고 조급한 나의 성정 때문이었다. 그러니 어떤 일이 있어도 의혹은 맨 나중이고 확실한 의혹이라 하더라도 더 필요한 이의 쓰임이라 생각한다면 훨씬 마음이 가벼울 것이었다.
아침 7시 여전히 캄캄했다. 어제의 비는 그치지 않고 어둠을 더욱 짙게 하고 더디 걷히게 했다. 호기롭게 둘이서 길을 나서다 어두운 길을 뚫지 못하고 주춤 뒷걸음치다가 폰 전등에 의지해 걷고 있는 사람과 합류한다. 그의 폰과 우리 폰의 빛이 합쳐지니 어둠을 뚫는데 수월해졌다.
3킬로미터 정도 이어지는 어둠과 숲을 지나니 부옇게 동이 터왔다. 숲이 끝나고 부르케테 마을이 시작되는 지점, 작은 카페에서 커피와 크로와상, 또띠야로 아침을 해결한다. 마을을 지나고 이어지는 목장과 숲길, 다시 마을과 목장과 숲길이 반복되고 오르막길과 내리막길이 이어졌다. 오늘의 오르막길은 어제에 비하면 요샛말로 껌이다. 지침도 힘겨움도 당연히 껌.
한국은 한창 근무시간이라 도착해 있는 메시지들을 확인했다. 사무실에서 온 톡들, 업무상 전화, 보험사, 광고성 전화들의 표시가 붉다 그 사이에 언니의 전화가 세 통이나 있다. 전화를 왜 받지 않냐고 약간의 원성과 걱정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언니는 나와 열일곱 살 차이다. 언니와 엄마가 열여덟 살 차이니 엄마라 해도 믿을 정도였다. 맏이인 언니는 아래로 동생 넷을 업어 키웠다. 우리 사 남매는 언니의 등에서 삶이 시작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러다 보니 언니에게 늘 빚 같은 것을 안고 살았다. 특히 나는 같은 여자로서 언니에 대한 책임감 같은 것이 있었다. 그 이면에는 귀찮음도 있었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같은 자매인데도 언니는 제대로 배우지도 못한데 비해 어렵사리 하고 싶은 공부를 마친 나는 남자 형제들과는 또 다른 느낌의 빚이랄까. 태어난 순서가 어쩔 수 없었다 해도 빚은 빚이었다. 만약 맏이가 아들이었다면 당연히 그렇지 않았음을 알기 때문이었다. 언니 자리가 나였대도 그랬을 것이다. 더구나 언니는 약 청각장애를 가지고 있어 가정에서도 친정가족들과도 섞이지 못했다. 그래서 빚진 마음은 더욱 컸다. 언니의 딸, 그러니까 조카가 어느 날 내게 따지듯 물었다. 왜 다 같은 자식인데 엄마만 가르치지 않았느냐고, 왜 엄마 청력을 일찍 치료해 주지 않았느냐고 듣지를 못하니 엄마와 정서적 교감을 하나도 하지 못했다고. 겉으로는 엄마에 대한 원망처럼 보였지만 외할아버지 외할머니 삼촌들 이모를 향한 원망이었다. 그랬겠다 싶은 마음에 할 말이 찾지 못했다. 언니와 조카들이 여느 엄마와 자식들처럼 평범하게 살아가지 못한 것이 사실이었으니까. 그래서였는지 언니는 자식들보다는 동생인 내게 전화를 하거나 어려운 일들을 털어놓곤 했다. 어쩌다 언니의 전화를 받지 못할 때면 괜히 귀찮음 섞인 미안함 같은 것이 한 겹 더해졌다. 더군다나 딸아이와 속 깊은 얘기를 하거나 여행을 할 때면 그런 마음은 더욱 커졌고 덩달아 조카들에게도 미안한 마음이 누적되곤 했다. 그러고 보니 언니가 된장 가져가라는 말을 한참 전에 했다. 보고 싶으니 겸사겸사 다녀가라고.
반대로 걷는 사람들이 있다. 신발, 양말까지 벗은 채 맨발로. 괜히 안쓰러운 마음이 또 동한다. 도대체 무슨 사연이 당신을 그리 걷게 만들었냐고. 부디 잘 이겨내기를 바랐다. 아무 일도 없는데 단지 나의 오지랖이 그저 발동한 것이면 더 좋겠다. 이 오지랖으로 언니에게 연락이라도 해봐야겠다.
여전히 비가 멈추지 않는다. 얼마나 더 내 기억 속에 머무르려고 이리 비가 내려 고생을 시키는 것일까. 오래도록 어제오늘이 내 안에서 사라지지 않을 것 같았다.
14년 전에 보았던 주비리는 여전했다. 다만 공립 알베르게는 더 낡아서 조금 비쌌지만 사립 알베르게에 짐을 풀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오후 다섯 시 반 성당의 종소리가 울리고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성당 근처 카페에서 머무르고 있다 잰걸음으로 성당으로 뛰어갔다. 이미 사람들이 자리를 채우고 있어 우리도 살며시 빈자리에 앉았다. 그런데 사람들이 힐끗힐끗 쳐다보기 시작했다. 동양인이라 그런가 싶어 꿋꿋하게 미사가 시작되길 기다렸다. 급기야 어떤 분이 가까이 오더니 속사포로 무슨 말인가를 쏟아 놓는데 알아들을 수가 없어 어리둥절할 밖에. 앞에 있던 사람이 조용히 설명해 주었다. 장례미사라고. 우리는 재빠르게 성당을 빠져나와 돌아가신 분께는 미안한 일이지만 크게 웃었다. 분명 미사는 11시 30분이라고 적혀 있었는데 이상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