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 에스테야가 나를 인도한 곳

다시 산티아고 8. 에스테야에서 로스 아르고스

by 지상

남녀 구분 없이 16명의 순례자가 같이 자는 방은 소음에 노출되어 있다. 아니나 다를까 두, 세 명이 한꺼번에 코를 골기 시작했다. 귀마개로 귀를 틀어막았다. 소음은 차단했으나 이번엔 귀가 답답해서 깊은 잠에 빠지기가 어려웠다. 홀로 어딘가 헤매는 것 같고 세상으로부터 격리되어 있는 것 같은 불안감. 소음은 살아 있다는 증거였던가. 들린다는 것 그리고 그로 인해 안전함을 느낀다는 것, 귀도 숨을 쉬는 것이 분명했다.


도네이션으로 운영되는 알베르게는 간단한 아침까지 제공해서인지 사람들이 꽉 찼다. 모두 둘러앉아 토스트와 커피, 우유 등으로 배를 채우고 길을 나섰다. 7시가 넘어도 별이 지천이어서 잠시 걸음을 멈추고 푸른 하늘을 우러러본다. 얼마만인가 저리 맑은 하늘과 별이라니.


하룻밤 풋사랑처럼 기댄 에스테야. 1090년 산초 라미레스 왕이 에가 강가에 만든 계획도시로 바스크인, 유대인, 프랑스인 등 여러 인종이 모여 살았다고 한다. 당시 번성한 상업과 수공업으로 인해 카미노 길 중 매우 중요한 도시이기도 했단다. 좋은 빵과 포도주, 고기, 물고기 등 음식이 넘쳐나는 행복한 도시‘라는 기록도 있다니 오래전부터 살기 좋은 도시였음을 알 수 있었다.


라 루아 거리, 산 니콜라스 거리를 지나 푸에로스 광장, 산티아고 광장, 산 마르띤 광장을 거닐었다. 햇볕 반, 그늘 반 드는 광장 테이블에 앉아 산 미구엘 한 캔을 서서히 마시며 오가는 사람들, 푸른 하늘이 이울면서 드리우는 건물들의 그림자를 응시했다. 언제 코로나19가 있었냐는 듯 마스크를 쓴 사람은 찾아볼 수가 없고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광장으로 모여 주말을 즐기고 있었다. 골목골목마다 젊은이들은 바닥에 앉아 대화를 나누고 그야말로 활기 가득한 도시였다. 생동감 있는 도시를 산책하며 마무리할 수 있어 꽉 채운 듯 하루가 뿌듯해졌다. 에스테야라는 별은 불평불만으로 부터 평화 쪽으로 한 뼘쯤 나를 인도했음이 분명했다.


잠을 조금 설치긴 했지만 마음도 몸도 걸음도 가벼웠다. 밴댕이 속 같은 나에게도 여유와 평화가 조금 들어온 듯했다.


100킬로미터 지점을 알리는 푯말이 서있다. 힘겨움은 800킬로미터 산티아고를 다 걸은 것만 같은데 아예기를 지나 이라체에 진입하니 나바라 지역에서 가장 유명하다는 수도원의 와인을 받는 곳이다. 미리 준비한 빈병에 절반쯤 받아 챙긴다. 어느때보다 풍요로울 오늘 만찬을 생각하니 배낭은 조금 더 무거워졌을지언정 마음은 이미 취한 듯 붉어지고 있었다. 여지없이 두 갈래 길에 섰다. 이왕 걷는 길이고 와인도 준비했으니 1.3킬로미터 먼 길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산그늘이나 쉼터가 거의 없는 크고 작은 언덕들과 들을 지난다. 언덕이 나타날 때마다 저 언덕을 넘어서면 무엇이 있을까 하는 궁금증이 그나마 힘을 보탠다. 산을 내려오는 사람들이 조금만 가면 정상이라고 선하고도 거짓 격려를 할 때 결코 그리 쉽게 정상일 수 없다는 것을 누구나 다 안다. 하지만 힘을 내 보는 것처럼 저 언덕만 넘으면, 저 언덕만 넘으면 되뇌며 힘을 짜낸다. 마지막 언덕일까 싶었는데 까마득한 들 사이로 이어진 길마저 사라지고 없다. 아자, 아자를 외치고 첫걸음인 양 길 위를 걷는다. 한 낮이면 아직은 덥긴 하지만 한결 유순해진 기분 좋은 햇살 덕에 아무 생각 없이 들판에 서서 멍을 때리기도 하고.


로스 아르고스는 이 도시를 건설한 후 왕이 마을 사람들의 용기를 치하하며 활이 그려진 그림을 선물하여 ‘활 모양’이란 뜻의 이름을 가졌다 한다. 에스테야 풍경과는 달리 텅 빈 거리에 문들은 굳게 닫혀 있다. 작은 광장에서 사람들은 맥주나 와인 한잔을 앞에 두고 하릴없이 햇살에 고여 담배연기를 날리고 있었다. 한 마을에 족히 서너 개 이상은 될 것 같은 성당들은 텅 비어 순례자들의 발걸음을 잠시 붙잡을 뿐이다. 팜플로나와 푸엔테 라 레이나의 공립 알베르게가 준 불편함 때문에 공립에 묵기가 망설여졌지만 이제 불편함보다는 쉼이 우선이 되었다. 힘겨움이 커지니 불편함은 점점 적어지고 아직 남아 있는 불편함에도 서서히 적응하고 있었다. 그러고 보면 힘겨움이든 불편함이든 견딜 수 있는 총량은 같은지도 모르겠다.


알베르게에 도착하자마자 주방이 있는 지 살핀다. 시에스타를 핑계 삼아 모든 상점들이 굳게 닫으니 시간을 잘 맞춰 재료들을 사둬야 한다. 대부분 계란이나 토마토, 양파, 채소를 사다 점심 겸 저녁을 해결한다. 무엇을 먹어도 진수성찬이고 맛있다. 오늘은 수도원 와인까지 곁들이니 한 끼 식사로 손색이 없었다. 찰기 하나 없이 흩날리는 밥이지만 밥을 해 먹을 수 있어 먹는 일이 걱정이 없다. 이제 드디어 조금씩 매일의 루틴을 잡아가고 있다.

(10월 2일, 일, 걷기 7일째, 21.4K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