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로그로뇨

다시, 산티아고 9. 로스 아르고스에서 로그로뇨

by 지상

27.6킬로미터, 오늘의 목적지는 로그로뇨다. 지금까지 걸었던 중 가장 많이 걸어야 한 날이기에 넉넉하게 30Km어치의 각오를 충전한다. 오래전에 걸었을 때 늦게 도착하는 바람에 공립 알베르게에 자리가 없어 실내 체육관에 매트리스를 깔아 수 십 명이 묵었던 기억이 새록새록 돋았다. 큰아이가 먼저 도착해 숙소를 잡으려고 했으나 도착 전인 사람은 접수를 받지 않는다며 도시 입구에서 걱정스러운 얼굴로 덩그렇게 서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쫓겨가듯 그렇게 체육관으로 향했던 발걸음이 지금도 생생하다.


대부분 아직 일어나기 전 6시 20분에 숙소를 나섰다. 스페인의 가을 아침은 더디 온다더니 새벽녘처럼 어두워 휴대폰 전등으로 길을 밝혔다. 저 앞에서, 저 뒤에서 한 두 사람이 전등으로 길을 나섰다는 것을 알려준다. 주변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단지 들판이구나 상상한다. 푸르스름한 하늘은 수많은 별들로 인해 더 맑다. 일찍 거동한 사람들만 볼 수 있는 특권이다. 7시경 동쪽 산등성이가 서서히 물들기 시작한다. 시간의 흐름과 걸음의 속도에 비례하여 해가 솟아오르고 있었다. 어둠에서 주황과 주홍을 거치고 화려한 색을 모두 벗은 채 모습을 보이는 태양. 드디어 모든 어둠이 연기처럼 사라지고 햇살이 내리기 시작한다. 한 치 앞을 가늠할 수 없는 어둠을 견디는 것은 이 순간을 위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1시간 반을 지나니 산솔에 도착한다. 아직 산솔은 거동 전인 듯 고요하다. 그다음 마을인 토레스 델 리오의 작은 카페에서 따끈한 커피 한 잔으로 먼길을 준비한다. 비아나까지 거의 10킬로미터, 거기서 로그로뇨까지는 11킬로미터로 갈 길이 멀다. 크고 작은 언덕들을 지나며 이따금씩 그늘을 만들어 주는 올리브 나무, 소나무에게 감사를 전한다. 그라시아스.


왕복 2차선 차도를 걷다 들길로 진입하는 이정표를 놓쳐버리고 말았다. 하지만 저 커브만 돌면 카미노 길이 분명 나올 것 같아 되돌아가지 않고 전진했다. 그런데 뒤따라오던 순례자까지 우리를 따라온다. 괜히 걱정스러운 마음에 카미노를 얼른 만나길 고대했다. 3킬로미터가 넘게 걸어도 카미노는 나타나지 않는다. 다행히 차량통행이 많지 않았지만 되돌아가면 되었을 텐데 ‘길 위에 길 있다’ 고 늘 하던 버릇이 도져 탈선을 하고 말았다. 그러게 김 네비가 한국에서나 통하지 이 넓은 스페인에서도 통한다는 보장이 어디 있단 말인가. 겨우 카미노 길에 들어선다.


언덕을 넘어서니 저 멀리 두 개의 도시가 나란하게 자리 잡고 있다. 오른쪽은 비아나, 왼쪽은 로그로뇨다. 3킬로미터 남은 비아나로 내리막길을 걷는데 승용차를 갓길에 세워두고 순례자들에게 포도를 나눠주는 사람이 있었다. 대를 이어 포도 나눔을 한다는 나름 유명한 라파엘 할아버지다. 나도 포도 한 송이 받아 들고 감사의 말씀을 전하니 우리의 이름을 묻고 당신의 이름은 라파엘이라 통성명한다. 따듯한 포옹으로 작별하고 길을 가는데 차를 돌려 우리 곁을 지나며 길을 축복해주셨다. 한 알 깨문 포도알은 달달함의 정점이었고 후한 인심도 최강 달달함을 뽐내고 있었다.

멀리서 봤을 때는 로그로뇨와 나란히 있었지만 비아나로 들어서니 로그로뇨는 더욱 멀어 보인다. 느린 걸음으로 비아나를 둘러보고 볕 든 광장에 머물며 보강 중인 성당을 바라보노라니 노곤함이 밀려왔다. 발가락 양말까지 모두 벗고 발을 말린다.


사실 어젯밤은 거의 지샜다. 옆 침대에서 밤새 코를 골아 겨우 숨이나 쉬며 밤을 새울 수밖에 없었다. 결국 모든 불편함은 내가 만드는 것임을 깨달은 밤이었고 지샘이었다. 그러면 그 코골이 처자랑 또 머물 수 있냐고? 천만의 말씀 백번 양보할 것이다.


마을에서 마을로 이어지는 건조하고 메마른 들판은 별일 없는 듯 고요하고 평화롭다. 건조하고 메마르다의 다른 의미는 별일 없음.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 평이함이 감사하고도 남는 일이라는 걸 새삼 다시 알아챈다.


로그로뇨는 여전했다. 중 3이었던 아들이 하염없이 나를 기다리던 다리, 하루 머물기 위해 지친 몸을 이끌고 체육관 쪽으로 향하던 길. 추억을 찍듯 사진을 찍었다. 하루 전의 에스테야에 비해 훨씬 규모 있고 사람들의 발걸음도 바쁘다. 돈 발도메로 에스빠르떼로의 기마상이 있는 정원, 빠세오 델 에스뽈론을 경계로 신 시가지와 구 시가지로 도시는 구분되고 상호 사이좋게 나눌 것을 나누어 도시를 이루고 있다.

대성당의 쌍둥이 탑이 오늘도 우리를 가장 먼저 반겨 주고. 저녁 무렵이 되자 선술집들이 일제히 문을 열고 사람들은 서거나 기둥에 기대 와인이나 맥주 한 잔으로 하루를 마무리한다. 나도 분위기가 괜찮은 선술집으로 들어가 맥주를 한 잔 시켜두고 오래오래 앉아 있었다.


날이 더해 갈수록 발걸음이 안정적으로 제 자리를 찾아가고 있다. 조급하게 서두르지 않아도 도시에 도착하는 시간이 조금씩 빨라지기도 하고 여유가 생기기도 했다. 도시의 골목골목을 편안하고 차분하게 들여다볼 수 있는 것도 그 이유다. 가까운 곳에서 바이올린을 연주한다. 익숙하고도 선명한 리듬이 성당 첨탑 너머로 지는 노을을 따라 퍼지고 있었다. 마음이 살짝 시큰해진다. 오늘 여기 있음에 감사해서, 그저 내 생각이지만 저 젊은 연주자의 삶도 고단할 것 같아서. 그래서 사는 것은 어디나 같아서. 오늘 고군분투한 모든 이의 삶에 평화로운 노을이 깃들길 바라며 나를 맞아준 대성당으로 들었다.

(10월 3일, 월, 걷기 8일째, 27.6k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