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라, 점복 이모

다시, 산티아고 10. 로그로뇨에서 나헤라

by 지상

나는 그녀를 점복 이모라 불렀다. 리오하 주의 포도 알보다 더 까만 눈동자로 나를 바라볼 때 비로소 눈동자에 빨려 들어갈 것 같다는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녀는 그렇게 깊은 눈으로 나를 탐색했다. 그리고 우린 친해지고 편해졌다. 아무 말하지 않고도 왠지 우리 둘이만 통하는 것 같아 흐뭇한 미소가 지절로 지어졌다.

그녀는 정신장애인으로 정신요양원에 있었고 나는 그곳의 직원으로 처음 만났다. 웬일인지 처음 만날 때부터 우리는 뭔가 보이지 않은 것을 함께 쥐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자주 그녀와 마주 앉아 고스톱도 치고 실없는 농담도 주고받고 풀피리 같이 여린 그녀의 목소리로 불러주는 트로트 물새한마리를 들었다. 다른 직원들을 부를 때는 선생이라는 호칭을 썼지만 나에게는 항상 이름을 불렀다. 그녀가 거주하고 있는 건물을 지날 때 창살 밖으로 손과 얼굴을 반쯤 내밀고 00아 하고. 그런 그녀가 참 좋았다.

그녀를 포함한 그녀들이 사는 곳에는 왜 창살이 있었을까. 문은 왜 잠갔을까. 벌써 20여 년도 지난 일이지만 그때 침묵했던 일은 내가 많이 잘못한 일중에 하나다. 그때는 그런 시절이었고 당연한 일이었다고는 하나 그것들을 없애야 한다고 생각지도 건의하지도 못한 내가 두고두고 후회스럽다. 지금은 창살도 잠금장치도, 울타리도 없지만 맡은 일이 달라져 그녀를 못 본 지 오래되었다.

로그로뇨 시내를 빠져나와 산허리로 올라서니 희귀종인 조류나 수초들을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졌다는 100년 된 그라헤라라는 호수에 물새들이 자유롭게 노닐고 있었다. 점복 이모에게 들은 물새한마리는 언제 어디서나 기억나 버리는 각인이어서 나도 모르게 몇 소절 흥얼거렸다.


오늘 출발지와 목적지인 로그로뇨와 나헤라가 속해 있는 리오하주는 와인 생산으로 유명하다. 그에 걸맞게 짧지 않은 길 위 양쪽으로는 거의 포도밭이었다. 특히, 10킬로미터를 고속도로와 인접한 건조한 길을 걷다가 중간지점 조금 못 미친 나바레테의 입구는 양쪽에서 포도나무들이 환영을 해주듯이 끝없이 즐비했다. 그런데 오른쪽 밭의 포도나무는 탐스런 열매를 가진 데 비해 왼쪽 밭의 나무들은 열매를 맺지 못하고 있었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열매를 맺은 나무와 그렇지 못한 나무 둥치가 다르다. 키는 비슷한데 열매 없는 둥치는 어른의 손으로 쥘 수 있을 만큼 여물지 못한 상태였다. 아직 시간이 필요한 것이다. 그런데도 어떤 열매들은 제 무게를 못 이겨 숭어리 째 땅에 떨어져 알알이 검은 점을 박고 있었다.


어느 인터넷 카페는 오늘 이 구간이 지금까지 걸었던 구간 중에 가장 편안한 길이라고 소개하고 있었다. 언덕도 두 개 정도 있지만 그 언덕은 매우 낮아서 힘들지 않다고. 그런데 편안함은 아무런 감흥을 주지 않는다. 편안함 마저도 힘듦이 있어야만 얻어지는 것. 더구나 곡선의 길도 아닌 도로를 접한 반듯한 길이어서인지 더 멀고 지루한 길이었다. 나바레떼에 잠시 머물다 벤토사를 못 본 듯 스친다. 마을 하나하나, 구석구석 보지 못한 것이 나중의 아쉬움으로 남을 수 있지만 그마저의 욕심도 내려놓고 아직 오지 않은 아쉬움을 수용했다.

두 개의 언덕 중 벤토사를 품은 언덕에 서니 멀리 나헤라가 들어온다. 우리 신체 중 제일 게으르고 속임수를 많이 쓰는 것은 눈. 언제 갈까 싶지만 생각보다 빨리 가기도 하고 금방 가겠거니 해도 한참 가야 하는 것. 길가 작은 공원에서 양말 신발을 벗고 발에게도 휴식을 주고 나도 의자에 드러누워 눈을 붙였다. 그렇게 10킬로 미터를 더 걸어 나헤라에 도착했다. 공립 알베르게로 가는 길에 아예 슈퍼마켓에 들러 저녁거리와 내일 아침거리를 산다. 오늘 저녁은 오랜만에 돼지고기를 굽고 상추, 고추를 곁들였는데 이탈리아에서 왔다는 남성과 겸상을 하게 됐다. 덕분에 와인 한잔을 얻어 마실 수 있었다. 우리 음식을 권했는데 노 탱큐. 아마 맛이 없어 보였나 보다. 하긴 어디 이탈리아에서 온 사람에게 내 솜씨를 내밀까. 가끔 사 먹기도 가끔은 해먹기도 하는 것이 이제 자리를 잡아간다.

참 이상도 하지. 하루 종일 물새한마리가 입에서 푸드득 거렸다. 근처 성당을 오가는 길에도 나는 물새한마리가 날았다. 점복 이모는 잘 계시겠지.


(10월 4일, 화, 걷기 9일째, 28.3k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