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13킬로미터의 갈등

다시, 산티아고 12. 그라뇽에서 에스삐노사

by 지상

포도나무들이 거짓말처럼 일제히 사라진 그라뇽을 떠나 대부분 걸음을 멈추는 벨로라도를 지나고 또산또스, 비암비스타를 건너뛰어 에스삐노사 데 카미노까지 걸었다. 어제 순례자들이 주로 머무는 산토도밍고 데라 칼자다를 지나 6.5킬로미터를 더 걸어둔 까닭이었다. 에스삐노사는 족히 20분이면 마을을 모두 돌아볼 수 있을 정도로 작고 한국의 시골마을과 다를 게 없다. 허물어져 가는 빈집, 햇볕을 쪼이고 있는 노인들, 모처럼 이방인의 발자국에 요란하게 짖는 개들... 친정집이 생각났다. 간다고 미리 연락을 하면 도착할 즈음 담장 너머 마을로 들어오는 모든 차를 확인하시고 대문 밖에 차를 세우는 소리가 나면 어서 오니라, 반갑게 나오시던. 먼 이국에서 오늘은 특히 더 그렇다.

에스삐노사 숙소 정원



13일째, 결국 딸아이와 터져버리고 말았다. 개와 고양이, 동물들을 극도로 싫어하고 무서워하는 딸애는 가는 곳마다 사람보다 더 많은 개와 고양이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다. 급기야 어제는 오후 참에 들른 카페에서 적극적으로 따라와 발치에 앉아 있는 고양이 때문에 신발을 신은 채 의자 위에 발을 올려놓고 있었다. 다 큰 애의 그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았고, 그동안 작은 것들과 겹쳐서 나는 나대로 마음의 일이 쌓여가고 있었다. 화장실에서 늦게 나오는 것, 매일 준비가 늦어 기다리게 하는 것, 식사를 늦게 하는 것, 헤픈 씀씀이.... 매일매일 쌓인 것이 30층 고층만큼이어서 그라뇽 숙소를 나오자마자 빈 들판에서 쌓인 것들을 여과 없이 쏟아내 버리고 말았다. 아이도 나름 쌓인 것들이 많을 텐데 내가 먼저 터트려 버리자 놀란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결국 20킬로미터 넘는 길을 각자 걸었는데. 날씨도 내 마음만큼이나 두터운 잿빛으로 흐려 있었다.

갈등은 길만큼이나 길고


아이들과 트러블이 있을 때마다 부모님이 생각났다. 서른에 닿은 아이들을 걱정하고 못 미더워하고 사소한 것들로 마음 상해하는 나 스스로를 보면서 성년이 되기도 전에 객지로 나간 나를 얼마나 걱정하셨을까, 걱정이 많은 엄마는 얼마나 내가 못 미더웠을까.... 그 끝에 늘 코끝이 시큰해 오곤 했다. 이것이 자식들이 갚아야 할 업보인가 싶기도 했다. 지금은 안 계시는 부모의 마음을 자식으로 인해 눈곱만큼이라도 헤아릴 수 있다면 다행이라 여겨야 맞을지도 모르겠다.



벨로라도로 들어서자 바로 성당이 있다. 잠시 들러 고요한 공간에 앉아 마음을 다잡았다. 도대체 내 안에 선함은 존재하고 있는가, 불만과 화가 가득 차 선함이라곤 손톱만큼도 존재하지 않는 것 같았다. 아무것도 아닌 일에, 그저 넘길 수 있는 일에 이리 속이 비좁다 못해 밴댕이 속 알 딱지보다 못할 일이 뭐란 말인가. 멀고도 먼 이곳까지 와서. 선함이 아닌 것들을 성당 안에 놓고 나온다. 마음이 한결 가벼웠지만 근처에서 기다리고 있던 아이에게 흔연스럽게 말을 붙이기가 어렵다. 먼저 다가가는 것이 내가 잘못했다고 인정하는 것 같은 그 마음마저도 성당에 두고 나왔는데 왜 이리 꼬리를 물고 쫓아다닌단 말인가.

내 마음만큼이나 좁은 벨로라도의 골목


마음이 조금 걷혀서인지 구름도 걷힌다. 아이와 나는 아직 서먹한 채로 마을 한 바퀴를 돌고 숙소 식당에 앉아 식사를 기다렸다. 조금은 거한 21유로짜리 저녁식사와 와인을 한 잔 곁들이다 보니 마음이 풀려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입을 열었다. 어제는 서로 너무 지쳐 있었다고, 한 걸음 떼기도 힘들었다고 그래서 작은 일도 편하게 넘기지 못했다고, 고양이 움직임도 다른 때보다 더 싫었다고, 화가 날 수 있고 낼 수도 있으나 그날을 넘기지 말고 얘기하자고.. 서로 악수하고 포옹했다. 화가 난 상태로 걸었던 오늘이 서로 어땠는지 나누며 부정적인 마음으로 시간을 허비하지 말자고... 나는 내 엄마의 마음이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다고 이야기하고 아이는 제 엄마를 이야기하며 서로 눈이 빨개졌다. 아이도 혼자서 성당에 머물렀다고.


화해는 맑음을 낳고


아이와 나의 마음처럼 구름이 비킨 하늘에 햇볕이 따숩고 바람이 많이 부는 날. 빨래는 서서히 말라가고 사람들이 떠나고 조용히 낡아가는 마을에 어둠이 깃들고 있었다.


(10월 6일, 목, 걷기 11일째, 24.13k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