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인 그녀

다시, 산티아고 14. 아타프에르카에서 부르고스

by 지상

우리가 처음 만난 날은 비 오는 피레네 산맥을 넘은 날이었다. 그녀도 우리도 순례자 메뉴를 예약한 때문에 론세스바예스 식당에서 만난 것이다. 유난히 과묵해서 말을 붙이기도 어렵고 그녀 역시 말을 붙여오지 않았다. 딱 중간에 앉은 나는 오른쪽 독일인들과 몇 마디 주고받다 왼쪽의 그녀에게도 어디서 왔는지 물었다. 프랑스에서 왔다는 그녀는 힘겨운 하루를 마치고 모두 흐뭇하게 와인을 한 잔씩 기울이는 것과는 달리 얼굴이 어두웠다. 상호 말이 안 통하고 영어도 짧으니 깊은 얘기를 나눌 수 없었다. 그런 그녀와 계속 같은 숙소에서 머물면서 눈인사를 나누기도 하고 어떤 날은 만나지 못한 채 지나갔다. 그녀의 걸음은 거북이 같았다. 토끼 걸음으로 뛰다시피 걷는 우리와는 달리 싸목싸목 느리게 한 걸음 한 걸음에 의미를 부여하듯 걸었다.

매일의 이사 같은 배낭은 집 한 채와 같고



로스 아르고스에서 로그로뇨로 이동하는 날이었던가. 거의 잠을 이루지 못하고 6시경 숙소에서 나왔다. 그날 걸어야 할 길이 30킬로미터에 가까워서 단단히 각오한 날이기도 했다. 그래서였는지 나의 걸음도 평소와는 달리 바삐 움직였고 또레스 델 리오라는 마을을 지나 산길로 드는 길을 놓쳐버리고 말았다. 구글 맵을 보니 도로를 따라가도 얼마 후쯤 카미노를 만나게 되어 있었다. 그런데 그녀가 내 뒤를 따라오고 있었다. 그녀도 길을 잃었는지 우리를 따라 무심코 걸었는지 모르겠지만 갓길도 없이 차들이 속도를 내는 길이라서 나 자신보다는 그녀가 더 걱정되었다. 아무래도 위험에 처했을 때 순발력 있게 피할 수 없을 것 같은 몸놀림 때문이었다. 그만큼 그녀는 느린 걸음으로 앞만 보고 걷고 있었다. 모퉁이를 돌아 그녀가 보이지 않을 때는 더 걱정되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그녀가 우리보다 앞서 걷는 것이었다. 무릎 위 20센티 정도의 수술자국을 애써 감추지 않은 반바지, 얇은 반 팔티에 자기 몸만 한 배낭을 메고 성큼성큼. 빨리 걷다 지쳐서 쉬는 동안 그녀는 그녀만의 스텝으로 묵직하게 걸은 것이다.

오늘로 걷기 12일째, 부르고스로 향하는 날이었다. 카미노의 도시들 중 몇 안 되는 대도시이기도 하고 일주일 넘게 작은 마을에서 머물다 보니 나도 모르게 마음이 들떴었나 보다. 20킬로미터 정도 걸으면 되는데도 일곱 시가 되기 전에 숙소를 나섰다. 스페인의 가을은 아직 서머타임이 풀리지 않기도 했고 일곱 시에도 새벽처럼 캄캄하고 여덟 시가 되어야 사위가 조금씩 밝아온다. 두 개의 휴대폰 불빛을 보태 길을 밝혔다. 저 멀리 앞에서, 저 멀리 뒤에서 움직이는 불빛을 보니 조금은 안심이 되었다.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들의 불빛에 같이 걷지 않음에도 서로 의지가 되는 것이었다.

저 멀리 부르고스의 불빛


밀 수확이 끝난 들판 사이로 난 길이 어쩌면 지름길이 아닐까 하는, 약간은 신뢰해도 될 만한 김 네비 안테나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사실 그동안에도 몇 번 안테나가 작동했지만 한국에서나 김 네비지 어디 가당치 않게 여기까지 와서, 하는 마음으로 일부러 작동을 멈추곤 했다. 그런데 오늘은 멈추는 걸 멈추고 네비가 작동한 대로 들판 사잇길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그렇게 삼,사십 분을 걷다 보니 카미노와 여지없이 만나게 되었다(절대 따라 하지 마세요). 그리고 저기 뒤에 프랑스인 그녀가 오고 있었다. 인사를 나눌만한 거리는 아니어서 앞서 걷기 시작했다. 최근 이,삼일 조금씩 더 걷고 작은 마을에 머무르는 바람에 그녀를 만나지 못했었는데 결국 부르고스로 들어가는 길에 그녀를 만나게 된 것이다. 지름길로 약삭빠르게 앞서가다 제풀에 지쳐 있을 때 그녀는 묵묵히 나를 앞서 걷기 시작했다. 무엇이든 급하게 질러가면 안 된다는 것, 그만큼 보는 것과 느끼는 것을 다 할 수 없다는 것, 자신이 가진 평소의 힘을 잘 사용하는 것. 그녀를 보며 배운 것이다.

네비의 촉이 발동한 지름길, 저 멀리 제 길을 가는 순례자



부르고스로 들어가는 초입부터 숙소까지 족히 세 시간은 걸었나 보다. 다 왔다고 생각할 때 목적지는 한없이 멀고 지루해진다. 아직 멀었다고 생각하고 도착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을 때 목적지는 그만큼 가까워진다. 도대체 실체도 없는 마음이란 것은 걸음을 늘리기도, 줄이기도 한다.

이전에 왔을 때는 부르고스까지 버스로 왔었다. 유적들이 많고 고딕 양식의 산타마리아 대성당이 있는 도시.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은 대성당 뒤쪽 전망대로 오르면 절반의 부르고스 시가지가 한눈에 들어오는 곳. 잠시 짬을 내 어느 블로거가 올려놓은 괜찮은 카페에서 아침 빛이 드는 쪽으로 앉아 일부러 햇살을 마주해도 좋은 곳. 14년 전 가톨릭에서 운영하는 작은 알베르게로 들었다가 걸어오지 않았으면 머무를 수 없다고 하여 쫓겨나다시피 공립 알베르게로 이동했던 곳. 오늘 머무는 알베르게 역시 걸어오지 않으면 입실 자체가 어렵다. 오롯이 걷느라 수고한 이들만을 위해 운영되는 곳이다. 그만큼 시설도 깨끗하고 조용하며 포근하다. 도착한 날의 저녁식사, 떠나는 날 아침식사를 제공해주고 저녁 식사 후 모든 순례자들과 함께 하는 짧은 프로그램은 온 길과 갈 길을 따듯하게 다독여 준다.

알베르게의 저녁 후 프로그램은 특별한 나로 만들고



프랑스인 그녀는 공립 알베르게로 들었을 것이다. 나도 그쪽으로 갔다면 오래 못 나눈 이야기라도 나눌 수 있었을 텐데... 아쉽지만 아직 남은 여정에서 다시 그녀를 만날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해 볼 밖에. 오늘 걸은 길은 대부분 아스팔트 길이어서 짧은 길이었음에도 무릎 발목이 시큰댄다. 더 많은 길을 걸었을 그녀의 무릎은 괜찮은지, 무슨 사연들이 걸음을 그리 묵직하게 하는지 마음이 쓰이는 날이었다.


(22108, 토, 걷기 13일째, 19.83k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