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르고스에서 하루를 쉬어준 덕분에 조금은 가벼워진 몸과 마음으로 길을 나섰다. 짧지 않은 거리를 걸어야 하니 마음의 각오도 좀 더 힘주어한다.아직은 어둠에 묻혀 있는 부르고스 거리를 가스등이 희미하게 밝히고 있다. 새벽 어스름에 움직이는 것은 언제나 뿌듯하다. 아직 기침하지 않는 거리, 초가을을 알리는 플라타너스의 큰 잎들이 뒹구는 거리에는 청소차 소리만 들려온다. 창가를 밝히며 한 집 두 집 불빛들이 흘러나오고 어디론가 바삐 움직이는 한 두 사람의 담배연기가 새벽으로 퍼진다. 며칠 째 한 낮 기온이 27, 28도를 웃돌더니 오늘은 가랑비가 내리고 있다. 우의를 꺼내 입고 배낭도 커버로 단단히 덮는다. 부르고스 대학을 지나고 변두리를 지나 본격적으로 메세타 지역으로 접어든다. 메세타는 고원 평야 지대로 부르고스부터 레온까지 펼쳐져 있다. 그러니 부르고스를 출발하는 오늘부터 레온에 도착하는 일주일 정도는 메세타를 걸어야 한다.
부르고스의 새벽참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은 밀 수확을 끝낸 평야뿐 멀리서 또는 가까이서 풍력발전기가 돌아가는 것이 그나마 움직임의 전부이다. 완만한 언덕을 올라서는가 싶으면 다시 완만한 언덕을 내려가는 것의 반복. 마을도 없어 걷는 일 말고는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잘 걷고 있나 걱정했던 한국 처자 효진 씨를 어젯밤 숙소에서 일주일 만에 다시 만났다. 또 한 명의 한국 처자 캐시와 함께. 맥주 한 잔씩 하며 왜 왔는지 왜 걷는지 나누게 됐다. 독일에서 10년째 일하고 있다는 캐시는 이 길에서 한국 사람을 만나고 싶었단다. 한국 사람들은 요즘 무슨 생각을 하며 어떻게 살고 있는지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고. 독일에서의 직장생활도 만만치 않아서 상처도 많이 받는다며 잠깐 휴식하며 사람을 만나 이야기하고 싶었다고. 무릎이 좋지 않아 빨리 걷지를 못해 다른 사람들이 계속 앞서 갈 때 이탈리아 친구들 둘과 천천히 걸으며 포도, 무화과, 해바라기씨 같은 것을 따먹다 보니 저녁 참에 숙소에 도착할 때도 있었단다. 한국사람들이 너무 빨리 걸어서 이야기하다가 헤어지고를 반복하며. 무릎이 아파 이틀 정도는 부르고스에서 쉬어야 해서 동행하던 사람들과 헤어지게 돼아쉬워하던 그녀가 계속 마음에 밟혔다.
직장생활 15년을 마치고 1년간 무급휴직을 받았다는 효진 씨도 직장에서의 갈등으로 인해 마음 정리를 하고자 이 길에 섰다고 했다. 문을 닫고 불을 내리는 열 시가 가까워오는 시간까지 오래 만나온 사람들처럼 이야기를 나눴다. 무엇이 이리 젊은이들을 이 길에 서게 할까, 안타까움으로 나 역시 젊은이들을 대하는 마음을 정비하는 시간이었는데 이후에도 사표를 던지고 왔다는 친구들, 취업준비 중 왔다는 친구들을 계속 만날 수 있었다. 그들의 시간은 지금 메세타 지역일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에 얼른 메마른 시간이 그들에게서 지나가기를 바랄 뿐이었다. 또 어떤 곳이라도 길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길 바랐다.
험해도 길은 있으니
아무것도 없는 길, 앞 뒤 사람들도 보이지 않을 만큼 길의 오르내림이 잦고 결국 혼자서 31.4킬로미터를 걸으며 온전히 시간을 견뎌야 했다. 문득 어젯밤 캐시의 말이 생각났다. 너무 빨리 걷는다던. 맞다. 나 역시 그러고 있었다. 아무리 천천히 걷자고 해도 매일매일 매 순간 습관대로 걷고 있었다. 마치 무슨 일이라도 있어 해결하러 가는 사람처럼. 의도적으로 걸음을 늦췄다. 간간히 붉은 열매들 곁에 한참 동안 서 있다가 이제 막 노란 꽃잎을 거두기 시작한 가을 민들레들도 들여다보았다. 하릴없이 이곳저곳 사진도 찍는다. 내 안으로 들어오기 시작한 풍경들... 그렇다. 어느 시인의 시처럼 자세히 보아야 한다. 그래야 올라갈 때 보지 못한 꽃 내려갈 때 보는 것이다.
쉼터인 작은 성당들
30킬로미터 가까이 되는 거리가 모두 평야이다 보니 따르다호스, 라베 데 라스 깔자다스, 호르니요스 델 카미노, 아로요 산 볼 등 네 개의 마을과 마을이 평균 8킬로미터 이내에 위치해 있다. 마을이 나타날 때마다 걸어야 할 길이 줄어 반갑고 이색의 풍경에 반갑다. 그냥 스치면 두, 세 시간은 아무것도 볼 수 없어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며 마을 삼매경에 빠져들기도 했다.
결국 먼 길을 해찰까지 하다가 제일 늦게 숙소에 도착했다. 당연히 침대도 제일 안 좋은 자리다. 괜찮다. 빨래 등 도착 후 해야 하는 루틴들을 재빠르게 해치우고 뻐근한 다리를 절룩이며 마을 한 바퀴를 돌아보았다. 창문마다에 제라늄이 커튼처럼 드리워져 있고 가을장미들이 담장에 바짝 피어있다. 삼십 분마다 울리는 성당의 종소리는 언덕을 넘어 평야로 평화롭게 퍼져나가며 고생했다고 다독거려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