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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상 May 19. 2022

망설여지는 쪽으로 직진

제주를 훔치다 1

  잠자리가 바뀌어서인지 혼자 있다는 것 때문인지 물수제비 뜨듯 띄엄띄엄 지난밤을 건넜다. 새벽 어스름에 블라인드를 올리니 희끄무레한 바다가 다가왔다. 서귀포의 아침이다. 

  2년 전부터 혼자만의 휴가를 나에게 주었다. 5일, 6일의 연가에 앞뒤의 주말을 보태 9일, 10일의 휴가를 오롯이 혼자만의 시간으로 갖기 시작했다. 그 세 번째 혼자만의 휴가 중 첫날을 서귀포에서 맞는다.

  올레길을 걸으려 했던 계획을 바꿔 서귀포 시내를 톺아보기로 했다. 클래식을 들으며 여유롭게 준비를 하고 서귀포 성당으로 향한다. 집에서는 가끔 거르고 싶던 게으름이 이 낯선 곳에서는 어느 때보다도 열성적인 신자인 양 주일미사를 거르면 안 될 것 같다. 첫날이니만큼 신께 여행 신고라도 해야 할 것 같은 마음이랄까. 코로나 19로 인해 멈춰있었던 거룩한 성가와 함께 올리는 미사에 마음이 평화로워진다. 감사하지 않을 일도, 용서하지 못할 일도 없을 것 같이 마음이 둥그레진다. 덩달아 눈시울도 따듯해진다. 


  이중섭 거리는 일요일인데도 한산하다. 늦은 봄 햇살만이 맑게 깃들고 있다. 지금은 운항을 멈췄지만 수년 전, 장흥 노력항과 성산포항을 오가던 여객선이 있었다. 오렌지호. 2시간 30분 정도로 당시 다른 곳에서 출발하는 여객선들보다 운항시간이 짧아서 이용객이 꽤 되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어느 날 문득, 출근길을 돌려 그 오렌지호를 타고 성산포로 향했던 적이 있었다. 생각해 보면 그때나 지금이나 불시 행동은 여전하다. 

  해안도로로 렌터카를 몰다 처음 들렸던 이중섭거리는 그때도 고요하고 한산했다. 점심때를 넘겨 반지하에 자리하고 있던 중섭 식당을 허리 굽혀 들여다보며 혼자도 식사돼요? 했던 기억이 어제 일처럼 생생하다. 그 중섭 식당이 지금은 어엿하게 1층에 자리하고 있다. 중섭 식당처럼 수많은 이중섭들도 조금은 살기 편해졌길 상상해본다.

서귀포 이중섭거리에 있는 중섭 가족이 거주했던 한 평 남짓한  방,  그는 여전히 쓸쓸하기만 하고.  


  칠십리 해변으로 발길을 돌린다. 커피 한 잔, 케이크 한 조각에 2만 원 가깝게 지불하고 보니 비싸도 너무 비싸다는 생각이 든다. 안 먹으면 그만일 텐데 바다와 커피, 이 달콤한 시간을 어떻게 포기할 수 있단 말인가. 조금은 호사를 부려보자고 아까움이 스민 마음을 다독인다. 그래 늘 허기지고 건조한 삶에 낭만 한 스푼 살짝 버무려 보자고.     

  결국 낭만이 과하고 말았다. 정방폭포를 돌아 나오는 길, 바다를 탁자 삼아 해녀들이 바로 물질한 해삼 멍게들을 팔고 있다. 잠시, 아니 한참을 망설이다 그녀들 앞에 쭈그리고 앉았다.  혼자 먹는데 조금 깎아달라... 안된다... 실랑이가 파도처럼 왔다 갔다 하다가 결국 소라를 더 올려주는 것으로 한 접시 ‘삼마넌’에 소주 한 병을 더하여 바다 곁에 앉았다. 바다, 그대와 건배! 소주 석 잔으로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해진다. 

 바다, 그대와 건배!   


  혼차 왕 외롭지양?  약간의 위로가 섞인 그녀들의 궁금증이 발치에 닿고, 등 뒤로는 삼삼오오 둘러앉은 여행객들의 눈길이 스쳤지만 나는 그저 빨개질 뿐이었다. 망설였던 것은 ‘아까운 돈’도 있었지만 두셋씩 같이 온 손님들 속에서 ‘여자 혼자’ 소주를 기울이는 용기가 덜했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내게 ‘망설여짐’이 왔을 때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망설여지는 쪽으로 직진하는 것, 내 인생을 더욱 두둑하게 하는 것을 또 한 번 깨닫는다. 여전히 망설여지는 나만의 여행법이다. 그렇게 불콰해졌던 혼자만의 시간과 바다를 품고 정방폭포 계단을 오른다.

해삼과 멍게, 소라도 내 여행이 궁금했을까?  


  발길을 서둘러 서귀포항으로 가까이 다가간다. 집어등을 매단 고깃배들을 품고 있는 항이 정겨워서 곁에 오래도록 기대어 있다. 소주한 잔에도 벌게지는 얼굴을 식힌다. 오래전부터 포구를 좋아해서 습관처럼 찾아다니곤 했다. 때가 되면 어디선가 포구들이 나를 부르는 것처럼 말이다. 해 질 녘 포구는 온 가족이 모여 저녁을 맞이하는 것처럼 따듯하다. 

 노을빛에 물든 서귀포항


   칠십리공원으로 해가 지고 저녁 어스름이 들기 시작했다. 타지에서 저녁을 맞는 일은 쓸쓸한 일이다. 아무리 혼자만의 시간이 익숙하다 해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편의점에 들러 와인 한 병을 사 들고 숙소로 향한다. 열흘 치 일용할 양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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