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통 물을 튕겨가며 손빨래를 하고 있는데 한국인 두 팀이 와서 세탁기에 빨랫감을 집어넣고 유유히 나간다. 순간 작아지는 내 모습... 잠깐 못나빠지고 말았다.
이 길에는 편리함 또는 편안함이란 유혹이 도사리고 있었다. 그중 가장 큰 유혹이 짐 옮김 서비스(동키 서비스)였다. 나 역시 며칠간 이용한 서비스였는데 날이 갈수록 가볍게 걷는 것에 익숙해져서 5유로쯤이야 하는 생각으로 이 매력적인 유혹에 빠져 있었다. 걷기에 적응이 되었을 때 유혹을 떨쳐버리고 일주일간의 편함을 상쇄하고자 30킬로미터 넘는 길에 다시 배낭을 멨다. 그 이후로 계속 함께 한 배낭은 원래 내 몸이었던 듯 점점 익숙해지고 있다.
두 번째로는 세탁 서비스였다. 평균 25킬로미터 이상을 걸어 숙소에 도착하면 가장 먼저 씻고 빨래를 해야 한다. 세탁장 안에는 대부분 세탁기가 설치되어 있고 바로 옆에서 손세탁을 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기계 세탁 3유로, 건조 3유로인데 배가 고프기도 하고 피곤하기도 하고 동네도 한 바퀴 돌아봐야 하고.... 특히 5시 넘어 도착하는 날이나 비가 오는 날에는 그 유혹이 극에 달했다. 규칙을 정해둘 필요가 있었다. 날씨가 맑고 5시 이전 도착하면 꼭 손빨래를 한다고. 그래도 옷이 안 말라 못 입는 일은 한 번도 없었고 조금 덜 마른 두꺼운 양말 같은 것은 다음날 배낭에 매달고 가면 금세 뽀송뽀송해졌다.
세 번째로 식사의 유혹이다. 주방이 없는 알베르게에 들어가면 어쩔 수 없지만 주방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편하게 사 먹고 싶어 진다. 피곤한 채의 배고픔을 참지 못하고 알베르게 비용보다 비싼 값을 치르고 밖에서 해결하고 싶은 유혹에 빠지곤 한다. 때론 주방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동네를 돌다 보면 분위기 좋은 레스토랑을 발견할 때, 앞서 간 사람들의 평이 좋은 레스토랑을 만났을 때 오늘만, 이라는 찬스 같은 함정에 빠져 끼니를 해결하게 되는 것이다. 이 또한 스스로와의 약속이 필요했다. 가령 40킬로미터 이상 걸었을 때나 5시 넘어 도착했는데 주방이 없을 때, 몸이 안 좋을 때는 밖에서 사 먹는다는 규칙과 약속.
네 번째로 사립 알베르게의 유혹이었다. 쾌적하고 깔끔하게 또 주방도 함께 운영하고 있는 공립 알베르게도 있으나 대부분 시설이 낙후되었거나 10인 이상, 심한 곳은 100명이 함께 써야 하는 공간이어서 여간 불편한 게 아니었다. 나처럼 예민함을 태어나면서부터 혹처럼 달고 나온 사람은 여러 사람이 한꺼번에 쏟아내는 수면 중 소음은 도대체가 극복하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작게는 5유로에서 많게는 30,40유로까지 추가 부담해야 하는 데도 사립 알베르게를 예약하곤 했다. 가장 넘어가기 쉬운 유혹이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 자책에 빠졌다. 그거 극복하려고 온 거 아냐? 산티아고 도착 9일 앞둔 시점에서 아직도 극복이 안된 일이다.
마지막으로 지름길의 유혹이다. 30킬로미터가 넘는 길을 걷는 날은 혹 구글 맵이 지름길을 안내해 주고 있지 않나 구간마다 구글을 들랑 달랑한다. 그러다 한 구간이라도 딱 걸리면 여지없이 지름길로 방향을 잡고 만다. 그래 봐야 4,5킬로미터이지만 원조 카미노를 걸은 사람보다 그 짧은 구간과 조금 일찍 도착했다는 것이 얼마나 달콤한 지... 그러다 보니 꼭 들러야 한다고 강조한 역사적이고 아름다운 유적지를 놓치기가 쉽다. 일정 상 서둘러 산티아고에 도착해야 하는 사람도 있지만 습관처럼 ‘빨리빨리’를 주문처럼 외우고 있지는 않은지 스스로를 잘 살펴봐야 한다.
변화무쌍한 카미노
배낭의 무게를 견디는 것, 손빨래를 해서 빨랫줄에 널어놓고 물방울이 뚝뚝 떨어지는 것을 보며 햇볕에 잠깐 조는 일은 얼마나 고즈넉하고 행복한지, 빨래를 하는 것은 나의 일이지만 말리는 것은 바람과 햇볕의 일임을 보는 것, 공립 알베르게에서 함께 요리를 하고 함께 먹으며 여러 나라 사람들과 손짓 발짓으로 소통하는 공동체성의 기쁨을 만끽하는 것, 단시간에 걸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거북이처럼 느려지기 위해 온 것... 돈 주고도 살 수 없는 것들을 경험하기 위해 왔다는 것 등 각자만의 목표를 정해야만 좀 더 뿌듯한 여행이 될 것이다.
오늘은 폰세바돈에서 묵는다. 아스토르가에서 출발한 지 두 시간 정도 됐을 때부터 비가 퍼붓기 시작했다. 도착할 때까지 다섯 시간을 내리 비를 맞고 걸었다. 우비를 입었는데도 배낭 안 침낭까지 모두 젖고 말았다. 일찍 도착했다 하더라도 오늘은 어쩔 수없이 세탁기와 건조기를 사용할 수밖에 없겠다 싶었는데 많은 순례자들이 비를 피해 한꺼번에 묵는 바람에 예약을 하지 않은 사람들은 거금 50유로를 주고 사립 호텔에서 외식을 할 수밖에 없었다. 아 이러니 규칙이나 약속은 깨라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대신 쾌적하고 뽀송뽀송하고 조금은 여유로운 저녁 시간을 갖게 되었다.
약간 옥탑 같은 룸이어서 하늘반 풍경반이 창문으로 들어온다. 유리창을 때리는 빗줄기가 6월 장마처럼 드세다. 하늘 아래 첫 동네같이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동네, 점점 포근해지는 방에 들어앉아 바깥 풍경을 바라보노라니 세상 걱정거리가 없다. 내일도 이리 비가 온대도 내일 일은 내일 걱정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