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싼 호텔 방에서 숙면하고 개운해진 기분으로 배낭을 싸기 시작했다. 침낭까지 반듯하게 개 넣고 남은 짐들을 챙기는데 작은 가방이 보이지 않았다. 거기에는 여권, 카드, 현금 등 나 자신은 잃어도 절대 잃으면 안 되는 중요한 것들이 모두 들어 있었다. 씻으러 갈 때, 화장실에 갈 때도 손에서 놓지 않고 심지어 잘 때조차 침낭 안에 품고 잤던 손가방이었다. 방안을 구석구석 뒤지고 절대 들어갈 리 없는 침대 매트리스까지 들쳐 보아도 보이지 않았다. 정신을 차리고 생각을 더듬어 보니 전날 저녁을 먹을 때 의자 등받이에 걸어둔 것이 생각났다. 아이는 레스토랑으로 뛰어내려 가고 나는 숙소를 이 잡듯 다시 뒤졌다.
때마침, 그동안 여러 번 마주쳤던 미국인 부부가 숙소를 나서려다 무슨 일인지 물었다. 상황을 설명하니 아직 열기 전인 레스토랑 문을 두들기며 호스피탈로가 나오길 기다려 스페인어로 가방을 봤는지 물어봐 주었다.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미소 지으면서 우리가 식사를 끝내고 떠난 후 의자에 걸려 있는 가방을 챙겨두었단다. 찾으러 오지 않아 자는가 보다 싶어 아침에 주려 했다고.
방에서 기도하며 원망으로 자책하던 나는 가방 찾았다며 계단을 뛰어 올라오는 아이의 발자국 소리에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그 모든 일이 10여분 동안에 일어난 일이었다. 지옥이 그런 느낌일까. 누군가 가져갔다면 여권과 카드만이라도 남겨두었길 간절히 바랐는데 가방이 돌아오자 현금 또한 제대로 있는지 확인하면서 눈물 반 웃음 반으로 가슴을 쓸어내렸다.
아직 한 달도 안 됐는데 많은 사람들의 도움이 있었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 파리의 샤를 드골공항에서 스틱을 통과시켜준 보안관, 잃어버린지도 몰랐던 스틱이 어디 있더라고 말해준 순례자, 길을 잘못 들었을 때 큰소리로 우리를 불러 세워 바른 길을 알려주던 마을 사람, 괴한을 쫓아가고 신고해준 후안, 빵을 나눠준 덩치 큰 순례자, 오늘 미국인 부부, 중요한 가방을 챙겨준 호스피탈로... 혼자 산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생면부지라도 보이지 않은 도움을 서로 주고받으며 살아가는 것.
숨넘어갈 듯했던 소란을 뒤로하고 폰세바돈 숙소를 출발했다. 해발 1500미터 고지인 마을이 한 치 앞도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짙은 안개가 가득했다. 영락없이 가방을 찾기 전 내 마음 같았다. 불빛도 크게 도움이 안 된다. 천천히 한 발 한 발 내딛는다. 마을을 벗어나 30분쯤 걸었을까. 철의 십자가 앞에 섰다. 오전 8시가 넘은 시간이지만 어둠과 안개에 가려진 십자가는 뿌옇게 서 있다. 푸엔테 라 레이나에서 미사 후 신부님이 걸어 준 목걸이를 십자가를 지탱하고 있는 나뭇결, 그 사이 박힌 돌에 걸며 나도 소원을 빌었다. 아침의 일 때문인지 마음이 울컥했다.
철의 십자가와 순례자
지리산 능선 같은 길을 걷는다. 고원에서 자라는 키 작은 나무들과 보라색 꽃들이 바람의 방향으로 흔들리고 있다. 날아갈 듯 휘몰아치는 바람에 안개도 함께 흘러간다. 비는 한 두 방울씩 옷을 적시고 세 시간 여를 걸어 아세보에 도착했다. 바윗길, 돌길, 자갈길이 건드린 발목의 통증을 달랠 겸 커피 한잔의 휴식을 곁들인다. 서울 목동에서 왔다는, 몇 번 마주쳐 낯익은 아저씨는 폰페라다로 가기 위해 택시를 불렀단다. 거기서 버스를 타고 사리아로 이동해 산티아고까지 걸을 계획이라고. 며칠 전부터 시월 말에 귀국해야 할 것 같다고 하면서도 쉽사리 걸음을 멈추지 못하더니 아세보 입구에 서 있는 모습이 낙엽을 떨어트리는 나무처럼 아쉬워 보였다.
폰세바돈에서 19.33킬로미터를 걸어 여섯 시간 만에 목적지 몰리나세카에 도착했다. 레온 산맥을 넘는 구간이었는데 만하린 마을은 모든 집들이 폐허 수준이었다. 할아버지 한 분 만이 순례자들을 상대로 기념품을 판매하고 있었다. 엘 아세보나 디에고 데 암브로스 역시 빈집이 많아 보였다. 딸아이가 출국 전부터 꼭 머무르자고 한 오늘 도착지 몰리나세카도 다른 마을보다 덜하긴 하나 집뿐만 아니라 성당도 굳게 닫혀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세의 분위기를 가장 잘 보존하고 있어 스페인의 아름다운 마을로 지정되어 있단다. 자연을 그대로 활용한 수영장 위 순례자 다리를 지나 오늘 묵을 알베르게로 든다.
스페인의 아름다운 마을 '몰리나세카' 초입
머물렀던 마을마다 공통적인 특색이 있는 가운데 각기 뛰어난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어 매일 아름다움이 누적되어 내 어깨쯤까지 쌓여 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불미스럽거나 가슴 쓸어내리는 일도 시간과 함께 자동적으로 씻겨 내려가는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