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미노에서 적절하게 말 걸기

다시, 산티아고 26. 몰리나세카에서 비야블랑카

by 지상

첫 번째 카미노 : 혼자만의 시간 걷기

대단하다 싶을 정도로 어린 친구들이 혼자 걷고 있었다. 20대 초반, 중반... 나는 그 나이 때에 뭘 했는지 생각도 안 나는데 이 먼 곳의 낯섦을 만끽하고 있는 대단한 친구들이었다. 대견하기도 하고 걱정스럽기도 했다. 발병은 안 났는지, 조심하라는 말 정도 남기고 스치는 사이였지만 가끔 어느 길 위를 걷고 있을까 궁금했다. 지윤 씨도 혼자였다. 사하군 알베르게에서 처음 만나 서로 한국인임을 확인하고 인사했는데 다음날 걷다 보니 홀로 앉아 허허 들판을 바라보며 간식을 먹고 있었다. 그 모습조차도 철저히 고요해서 말 붙이기가 어려웠다. 다음 마을 카페에서 다시 만난 그녀와 조심스레 동석했다. 직장을 그만두고 오롯이 쉬고 싶어 왔다고, 매일 20킬로미터 이내 느릿느릿 걸으면서 여정을 즐기고 있다고 했다. 잠깐 이야기를 나눈 후 그녀만의 음미를 온전히 존중해야 할 것 같아 먼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엄마 마음, 이모 마음 같은 걱정이 올라왔지만 한마디의 지지, 따듯한 눈인사가 더 도움이 될 듯했다.

첫날, 생장 드 피드포르에서 만난 효진 씨도 혼자였다. 이후 팜플로나에서도 에스테야에서도 사진을 찍고 뭔가 기록하는 그녀를 잠깐씩 지나치면서도 차 한잔 같이 하자고 말 붙이기가 어려웠다. 오히려 마주침을 피해 줘야 할 것 같은 생각마저 들었다. 직장일이 버거워 휴직을 하고 왔다는 그녀. 그래서였을까 배낭조차 버거워 보였다. 부르고스 이후 만나지 못해 걱정 반, 궁금함 반인데 물론 효진 씨는 잘 걷고 있을 것이다. 용감한 지윤 씨, 효진 씨 부엔 카미노


순례자를 배웅하는 몰리나세카 야고보상



두 번째 카미노 : 여러 사람과의 시간 걷기

카미노를 다섯 번째 왔다는 서울 아저씨. 왜 그렇게 자주 왔느냐고 물으니 여러 나라 사람들을 만나서 이야기하는 게 좋단다. 아니나 다를까 온타나스에서도, 아스토르가에서도 기분 좋게 한 잔 하며 몇몇 외국인들과 어울리는 아저씨를 볼 수 있었다. 언뜻 봐도 한국인보다는 외국인 친구가 더 많아 보였다. 정년하고 열정적으로 사람들과 만나면서 삶을 주도하는 그분이 대단해 보였다. 그런 분이 서울에 일이 있다고 택시까지 불러 타고 가던 발걸음이 매우 무거워 보인 것은 내 생각만은 아니었으리라.

아예 단체로 와서 친목대회라도 하듯 함께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걸을 때는 각자 걷다가 한 숙소에서 함께 음식을 만들어 먹고 취침시간까지 이야기하고 즐기는 팀이었다. 숙소에 먼저 도착한 사람들이 늦게 온 사람들을 박수로 맞아주던 그들의 미션이 부럽기도 했지만 혼자만의 시간, 조용한 시간을 걷고자 온 나 같은 사람에게는 저들이 얼마나 힘들까 가늠하게도 했다. 어디 그뿐인가 가끔은 시끄러운 그들로 인해 내 속까지 소란스러워질 때가 있었다.

혼자 왔지만 친구가 돼서 함께 걷는 이들도 있었다. 둘이서 혹은 셋이서 친구가 되어 함께 밥을 먹고 한 숙소에 머물며 좀 더 가까운 친구나 연인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온타나스에서 만난 그 젊은 친구들도 그랬다. 각자 와서 이 길에서 만났다고. 서로 의지하고 의논하면서 오래된 친구처럼 시간을 쌓아가고 있는 듯했다. 각자 계획한 여행 일정들도 조정하면서. 로스 아르고스에서 처음 만났던 이목구비 수려한 이탈리아 여성 순례자도 처음에는 혼자 걷더니 폰세바돈 숙소에서부터는 멋진 친구와 함께 하고 있었다. 그다음 날 아침 식사도, 걸음도 그 멋진 남성과 함께였다. 이 모든 친구와 연인들도 부엔 카미노.


아쉽게 지나갔던 도시 폰페라다



세 번째 카미노 : 혼자만의, 그리고 여러 사람과의 시간 걷기

가장 많은 사람들의 걷기일 수도 있겠다. 특별한 인연을 만들기보다는 혼자일 때는 온전히 혼자로, 둘이나 셋 일 때는 차 한잔, 밥 한 끼 하고 스쳐가는 인연. 통성명하지 않아도 편하게 대화하고 그저 잊혀 가는 사람들. 나에게도 이렇게 수많은 이들이 스쳐갔다. 론세스발레스 저녁식사자리에서 만난 프랑스 여인과 독일인들, 어두운 새벽길을 함께 밝히며 걸었던 여인, 나헤라 알베르게에서 겸상하며 와인을 같이 했던 이탈리아의 수염 긴 남자, 그라뇽 알베르게에서 저녁을 나누며 통성명까지 했지만 그저 잊은 7인의 외국인들, 부르고스 공립 알베르게에서 처음 만난 시은 씨, 카리온의 글라라, 송이 씨, 스치고 만났던 수많은 순례자들, 그대들도 부엔 카미노

목적지는 같을 지라도 각자가 지향하며 걷고 싶은 100인 100색의 카미노다. 그러니 각자의 목표대로 길을 걸을 수 있도록 얼마쯤의 배려도 챙겨가야 할 필수품이었다.

처음 만난 짤순이, 반갑다



리호하 주를 떠나고서부터는 한동한 보이지 않던 포도나무가 다시 펼쳐지는 들과 산, 언덕을 지나 비야블랑카 레오 알베르게에서 짐을 풀었다. 그리고 드디어 짤순이를 발견했다. 맘 편한 손빨래를 하고 짤순이에 돌려 벽난로가 따듯하게 지펴주는 공간에 옷가지를 널었다. 햇볕, 바람아래의 감성에 비길 바 못되지만 벽난로 언저리에서 고슬고슬하게 말라가는 풍경도 푸근했다.

비야블랑카는 어제 머문 몰리나세카와 함께 카미노에서 아름다운 마을로 선정되어 있다. 숲으로 둘러싸인 귀족의 저택들이 보존되어 있고 바로크 양식의 주교관, 로마네스크 양식의 산미겔 성당과 성, 몇 대째 운영되고 있는 알베르게, 엔리케 길 이 까라스코의 생가가 있다. 우리나라에서 방영된 스페인 하숙으로 유명해진 알베르게도 있고. 특히 이 마을의 산티아고 성당에서는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대성당에서 주고 있는 축복과 대사를 주고 있다고 하니 산티아고까지 갈 수 없는 이들의 아쉬운 마음을 다독거려 주기도 한다.

비야블랑카에서 머물거라 했던 몇몇 한국인들과 미국인 부부는 어느 알베르게에서 짐을 풀었을까. 어디에 있든 굿 나잇.

(22년 10월 21일, 금, 걷기 24일째, 30k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