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잠을 설친 날도 망설임 없이 침낭 자크를 열고 일어난다. 자동이다. 아직 자고 있는 순례자들을 위해 살며시 밖으로 나와 배낭을 챙긴다. 이른 출발, 상쾌한 새벽녘이 조금은 피로를 녹여준다. 도로변으로 나 있는 좁은 길이었지만 이른 시간이어서인지 차량 통행이 많지 않다.
묵향이 만져질 것만 같은 이 시간의 어둠과 적요, 묵직한 침묵과 싸늘함, 약간의 허기, 그리고 배낭의 부피, 무게, 질감이 등에 스며들며 생겨나는 미열 같은 온기, 낯설고 마알간 아침의 민낯, 이것들에 빠져 헤어 나올 수 없으니 차라리 더욱 적극적으로 반하고 있다.
이틀 전 묵었던 몰리나세카와 함께 아름다운 마을로 선정된 비야블랑카! 어제는 온통 울퉁불퉁했다. 건물과 길, 다리 등은 고스란히 중세 그대로 남아 미로 같은 오밀과 조밀이 교차하고 휘어지며 돌 도로를 연결하고 있었다. 골목은 반질반질한 손때와 발때, 자동차 바퀴의 흔적이 오랜 세월 거기에 쌓여 먼 옛날 속으로 들어온 듯했다. 마을을 돌아보는데 도착해서까지 돌길을 걷는다고 발목은 시큰시큰 어깃장을 놓고 절뚝절뚝, 통증의 각도로 중세의 정취가 기우뚱거렸는데. 그래서였을까 잠도 울퉁불퉁해서 선잠이었다.
강을 사이에 두고 곁한 현대는 건물의 형태나 분위기가 완전히 달랐다. 곤한 가로등 불빛이 카미노의 시작을 배웅으로 밝혀주고 이르게 출발한 순례자들의 스틱 소리가 똑, 똑, 거리의 고요함을 흩트렸다.
비아블랑카 중세 지역을 넘는 다리, 카미노의 시작점
이정표가 쉬이 눈에 띄지 않아 몇 번인가 어둠 속을 두리번거리다 어느 정도 강을 거슬러 올라갔을 때 도로를 따라 걷는 카미노로 진입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주변은 꽤 높은 산으로 둘러싸여 계곡을 걷는 것 같았다.
오 세브레이로 마을로 진입하는 언덕은 카미노에서 급경사로 유명했다. 더군다나 비라도 올라치면 흙길에 미끄러지고 넘어져 진창이 따로 없는 가장 어려운 구간이라는 소문이 자자했다. 열여덟 번 왔다는 순례자는 딱 오늘이 그런 날이라고 비가 더 쏟아지기 전에 오 세브레이로 언덕을 올라야 한다고 재촉했다.
비야블랑카를 출발해 두 번째 마을인 뜨라바델로에서 요기를 하고 막 출발할 즈음부터 내린 비는 오 세브레이로에 도착하기 전부터는 태풍처럼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8킬로미터에 달하는 경사를 겨우 올라 도착했을 때 더는 걷기가 어렵겠다 싶을 정도였는데 애초에 묵으려고 했던 공립 알베르게에 대한 사람들의 평이 그다지 좋지 않았다. 급기야 화장실 문이 없다는 것. 전방 3킬로미터 지점에 있는 리냐레스까지 가자고 결정하고 잠시 비를 피해 숨을 돌렸다. 그제야 눈에 들어오는 풍경, 두툼한 안개가 에워싸고 있는 짱짱한 스크럼 위로 비가 쏟아지고 있다. 산과 비와 안개가 파도타기를 하듯 하나가 되어 같은 방향을 넘나든다. 세계적인 작가 파울로 코엘료가 글의 영감을 받았다는 곳, 나도 여기 머물면 언어의 연금술사가 될까? 그럴 리가 없겠지만, 가망 택도 없는 일이지만 그렇게만 될 수 있다면 화장실 문이 아니라 화장실이 없대도 머무를 수 있을 것 같았다.
도로 곁 산길 자작나무 숲으로 조성되어 있는 카미노에 여전히 비바람이 심했지만 어쨌거나 걷다 보면 세상의 모든 목적지에 도착하기 마련. 공식적인 마을로도 소개되어 있지 않은 리냐레스. 저 멀리 대여섯 채 집들이 조개껍데기처럼 엎드린 가운에 신축한 지 얼마 되지 않은 깔끔한 알베르게가 빗속을 뚫고 눈에 들어왔다
오늘 도착지 리냐레스
다 젖은 옷가지를 세탁기에 돌리고 숙소 앞 구멍가게에서 간단한 저녁거리를 사다 일찌감치 저녁도 먹어 치웠다. 토마토 볶음, 샐러드, 빠에야에 오늘은 더 고생했으니 와인도 한잔. 1500미터 고지대 알베르게 주방 식탁에 앉아 바라보는 바깥 풍경은 변화무쌍하다. 산과 능선들이 자욱한 안개에 사라졌다 나타나고 마당 빨랫줄과 빨래집게들이 할 일을 잃은 채 하염없이 비에 젖고 있다.
이제 서서히 어둠이 내릴 것이다. 그리고 아무것도 분간할 수 없는 짙은 밤이 되면 순례자들은 하나둘씩 주방으로 나와 늦은 저녁을 준비하느라 알베르게 만이 환한 빛을 밝힐 것이다.
융숭한 저녁
이리 호젓한 시간, 흡사 안갯속 같고 꿈만 같은 날들이 내게 주어지다니, 고생 끝의 낙은 이런 것인가 싶었다. 비바람이 계속된다 해도 오늘처럼 비를 맞으며 걸으면 될 일, 내일 걸음은 내일 걱정하면 된다고 그저 반하고 싶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