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산티아고 29. 사모스에서 포르토마린
사모스로부터 14.5킬로미터 지점 사리아에는 유난히 이정표가 많았다. 온 도시가 일제히 순례자를 환영해주기로 약속이나 한 것처럼 도로에 큼지막하게 그려진 이정표, 벽에 딱 붙은 이정표, 가로등에서 환한 이정표, 꽃으로 어여쁘게 핀 이정표, 조개껍데기 이정표, 세상의 모든 이정표들이 사리아에 다 모여 있었다. 묵은 통증들까지 스르르 녹아내렸다.
14년 전 버스로 도착했던 곳. 그때도 공립 알베르게를 이용하지 못해 사립 알베르게로 들었었다. 좁은 공간에 다닥다닥 배치되어 있는 침대 2층에 앉아 내려다본 시내는 저녁 아홉 시가 되어도 환했다. 도시는 변했지만 미사마저 쓸쓸했던 성당과 그 위쪽으로 즐비하던 알베르게는 여전했다.
그때 이 길은 내게 어떤 이정표였을까. 천방지축 아이들과 이 길을 걷자고 생각했던 것부터 무모하기 짝이 없었지만 나를 멈추지 않고 행동하는 쪽으로 이정표를 제시한 것은 물론, 낯섦과 긴장, 거기에서 오는 불안을 오히려 동경하게까지 했다. 어디 카미노뿐이겠는가.
태어날 때부터 갖고 있었던 가난은 내 삶의 가장 큰 이정표였다. 딛는 곳마다 결핍이었고 숨 쉬는 것도 돈이 드는 일이었다면 벌써 죽었을 거라고 슬픈 농담을 키우던 때였다. 배움이 끝나고 삶도 끝난 것 같았던 열아홉 살, 살겠다고 오기를 부리는 것도 바늘구멍만큼의 가능성이 있어야만 한다는 걸 그때 알았다. 절망이 온몸으로 퍼졌다. 그 무렵 지친 내 삶이 도착한 곳은 노틀담 수녀회였다. 두 번째 이정표였다. 수녀님들과 봉사자들이 나와 같던 우리들을 위해 헌신하며 생을 걸고 있었다. 지독한 결핍의 공간이 메워지고 절망이 조금씩 닳기 시작한 그즈음, 놓아버렸던 꿈같은 것을 가져도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돋기 시작했다. 내 생에 가장 찬란한 시기였고 평화롭고 뜨듯한 날들이었다. 그날들은 지금까지도 토양이 되고 있다.
그분들께 받은 것을 갚는다는 마음으로 시작한 봉사 활동과 봉사활동했던 곳이 직업이 되었고 직장이 되었다. 그분들께 배운 헌신과 봉사로 돈벌이를 넘어서는 전문적인 직업인이 될 수 있었고 책임도 맡게 되었다.
나는 누군가의 이정표가 된 적이, 혹은 되고 있는지 생각해 본다. 모든 삶이 꽃길일 수는 없겠으나 어느 한 철, 꽃같이 활짝 이정표가 되어준다면 그 누군가는 또 누군가의 이정표가 되어줄 것이다. 두고두고 이정표는 이정표를 낳는 것이다.
가난과 결핍은 정해진 길이 아닌 멀리 돌아가게 하고 더디 가게 한다. 돌아가고 더디 가다 보면 원하든 원하지 않던 더 많은 경험과 사람을 만난다. 다만 조금 늦을 뿐이다. 흡사 카미노와 같다. 그러니 어느 시기에 잠깐 돌아간다 해도 걱정하지 말길!
아무리 수많은 이정표가 어서 가라고 해도 사리아를 그냥 지나치기엔 아쉬웠다. 아이들과의 추억도 오래된 건물처럼 멋스럽게 잘 익어 있고 그때 못 본 도시를 샅샅이 볼 수 있다는 유혹이 팔을 잡아끌었지만 때마침 체육활동을 하고 있던 초등학생들의 해맑은 배웅으로 아쉬움을 달래며 사리아를 떠났다.
37킬로미터의 먼 길이었지만 유리알 같은 하늘, 오솔길, 나무들이 첫날인 양 설레게 했다. 다른 날보다 한 시간 가량 늦게 출발했으니 발길을 재촉해야 하는데도 툭툭 져 내린 아람한 밤송이들을 두 발로 마주 까면서 해찰과 걷기를 반복했다. 사리아에서 멀어지면서 이정표도 줄고 목적지 포르토마린이 저 멀리 눈에 들어왔다. 입구의 큰 강과 도시는 엊그제 본 듯 정겨운데 세월 따라 강물도 흘러간 것인지 강은 바닥을 드러낸 채 수려했던 위엄은 간데없었다.
이전의 포르토마린은 1966년 벨레사르 저수지를 만들면서 수몰되었고 새로 만들어진 지금의 장소에 중요한 건물들은 이전했다고 한다. 과거와 현재의 조화로움이 더욱 묵직하게 와닿았다. 새로운 것만이 아닌 옛것을 그대로 살리는 지혜는 다음 세대까지 풍요롭게 해 준다는 것을 다시 느끼게 했다.
알베르게와 인근에서 낯익은 순례자들을 다시 만나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안부를 주고받았다. 약속은 하지 않았지만 우리는 서로 응원의 이정표가 되어주고 있었던 것이 틀림없었다.
(22년 10월 24일, 월, 걷기 27일째, 37.8킬로미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