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 것인가, 말 것인가

다시, 산티아고 33.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서 빌라세리오

by 지상

산티아고에는 0km 이정표가 없었다. 대성당 주변을 살펴보고 블로그를 뒤져보아도 언급이 없었다. 추측컨대 대성당이 0km지점인가 보았다. 그럼에도 나는 0.0km 이정표에 발을 딛고 싶었다. 그것이 끝이라고, 그것이 완주라고 마음이 외치고 있었다.

산티아고에서 피니스테라까지 공식적인 거리는 89km. 숙소에서 시작점까지의 거리가 있으니 90km가 넘는다. 만일의 경우 지체할 수 있는 여윳날이 없어 삼일 동안 소화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30Km 이상 걸었던 지난 한 달간의 저력을 다시 발휘할 때였다.

대부분 늦잠으로 산티아고 입성을 즐기고 있는 시간 어둠이 걷히기 전 대성당으로 나갔다. 전날 둘러보지 못한 대성당의 왼쪽과 오른쪽 주변을 잠깐 돌아보고 광장 중앙에 서서 여느 관광객처럼 조금은 과한 포즈를 취한 채 사진도 찍었다.

아쉬움을 안고 텅빈 광장에 서 있으려니 이른 아침기운이 온 몸을 감싸왔다. 어느 아침보다 고요하고 묵직한 무언가가 가득 차올랐다. 마음 한 켠에서는 여기서 멈춰, 여기까지도 훌륭해, 누가 뭐라고 하는 것도 아니잖아,귓속을 간지르며 유혹의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조금 흔들렸다. 땍!!! 머리를 흔들어 1도 도움 안되는 몹쓸 생각들을 털어냈다.

산티아고를 벗어나는 길, 지금까지와는 달리 산과 강과 언덕, 마을이 짧은 간격으로 이어져 있었다. 메세타 같은 평야가 아니어서 저 등성이 너머엔, 저 모퉁이를 돌면, 이 산을 벗어나면 어떤 풍경들이 다가올까 상상하는 재미가 있었다. 하지만 그 상상속에는 두려움도 컸고 발걸음의 속도는 두려움에 비례했다. 그렇게 산 넘고 물 건너 벤토사에 도착해 차 한잔 하고 일어서는데 언제 뒤따라왔는지 한국인 순례자가 들어왔다. 작년에 왔을 때 산티아고에서 피니스테라까지 걷지 못해 이 구간만을 걷기 위해 다시 왔단다. 대부분 산티아고까지의 걸음을 아쉬워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고 보니 어느 블로그에서도 봤던 기억이 났다. 고생을 연장하는 선택, 남들이 잘 가지 않은 길로 들어선 것이 조금은 위안과 힘이 되었다. 굳이 가지 않아도 될 길을 굳이 가고 싶지 않음을 품고 가야하는 무게가 조금은 덜어졌다고나 할까.


20221028_085131.jpg 피니스테라, 묵시아 시작점



하긴 살면서 가지 못한 길 또는 가고 싶지 않은 길을 가야 하는 경우가 한 두 번 뿐이겠는가. 나는 작가가 꿈이었다. 먹고사는 일이 바빠 전업 작가가 되진 못했지만 마흔 살이 되면 글만 쓰며 살겠다고 입버릇처럼 얘기를 하곤 했는데 그 꿈의 근처에도 가보지 못하고 쉰을 넘기고 말았다. 삼십대 초반 지방지 신춘문예에 당선된 일은 오히려 독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언제든 맘만 먹으면 다시 글을 잘 쓸 수 있을 것이라는 자만만이 켜켜이 쌓여갔으니...

요즘 문학지나 언론사의 당선 작가들은 대부분 젊어 그것만으로도 글쓰기의 한계를 느끼고 너무 멀리 와버렸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그렇지만 다시 갈 수 있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단어만으로도 가슴떨리는 신춘문예 당선, 그 즈음으로는 돌아갈 수 없고 창의력도 신선도도 바닥이지만 길을 만들 수도, 브런치와 같이 누군가 만들어 놓은 길(사실, 브런치 작가 신청에서도 한 번 떨어졌다)로 들어설 수도 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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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많은 길, 갈 것인가, 말 것인가.



20킬로미터 지점인 네그레이라를 지난다. 대부분 이곳에서 머문다고 하는데 우리는 13킬로미터를 더 걷기로 했다. 남들이 하지 않은 것을 참 여러가지로 하는 날이었다. 도착할 때까지 만난 순례자는 서너 명 뿐이었고 그 순례자들마저 어느순간 앞서 가버렸다. 한치 앞을 가늠할 수 없는 두터운 막막함, 차라리 앞을 볼려고 애쓰지 말자고 스스로 용기를 북돋았다. 이 순간만을 잘 견디며 사람도 강아지도 고양이도 차량도 드문 이 길을 따라가자고. 그만큼 한적하고 호젓해서 내 마음 안에 더 깊이 더 진하게 남을 것이라고.

버스로 관광을 온다는 스페인의 또 하나의 아름다운 마을 폰테 마세이라를 지난다. 마을 앞으로 탐프레강이 흐르는데 계속되는 비로 강물이 다리 가까이 차올라 있다.

날씨는 계속 흐리고 산비탈 집 몇 채 조가비처럼 오밀조밀 모여 있는 빌라세리오로 안착한다. 노부부가 호박죽을 끓여 순례자들의 마음까지도 따듯하게 데워준다는 알베르게를 찾다 결국 다른 알베르게로 들었다. 그것이 문제였다. 건물은 방수가 되지 않은지 물이 새고 침낭마저 습기가 가득 차 축축한 채로 잠을 청할 수밖에 없었다. 빨래건조기는 작동이 안 돼 괜히 4유로만 날리고 기분도 마음도 수면도 옷가지도 축축한 날이었다. 이 모든것이 가지 않은 길을 가는 대가였다.


(22년 10월 28일, 금, 걷기 31일째, 33.3킬로미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