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칼립투스를 듣다

다시, 산티아고 34. 빌라세리오에서 쎄

by 지상

슬쩍 잠이 들었나 싶었는데 세차게 흔들리는 창문소리에 새벽잠이 깼다. 리냐레스 그 아침에 버금가는 비바람이 요동치고 있었다. 40킬로미터를 넘게 걸어야 하는데 걱정이 앞섰다. 설상가상으로 전날 빨아놓은 옷가지들이 막 세탁기에서 꺼낸 듯 여전히 축축한 그대로였다. 모든 계획이 엉망인 아침이었지만 입어야 할 옷들은 안 마른 채 입고 남은 옷가지들과 물건들을 배낭에 채워 짐옮김 서비스를 신청했다. 현관에 앉아 뭔가 주셔야 한다면 비나 바람 한 가지만 주시라고 그 어느 때보다 간절한 마음으로 소원하며 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한편으로는 온전한 순례자의 길에 스크래치가 나는 것 같아 아깝고 아쉬웠지만 대중교통으로 이동하는 방법도 진지하게 고려했다. 무엇이 됐든 날이 밝아야 가능한 일이어서 기다리는 수밖에 할 일이 없었다.

한 시간이 지나자 다행히 비바람이 조금씩 잦아들기 시작했다. 여전히 어둠은 짙었지만 길 위로 올라섰다. 우리 둘 뿐, 다른 순례자의 불빛은 보이지 않았다. 더군다나 내 휴대폰이 고장 난 바람에 불빛 하나에 온전히 기댈 수밖에 없었다. 어둠만큼이나 두텁고 생경한 두려움이 밀려왔다. 도로의 좁은 갓길을 딸아이와 손을 꼭 잡고 가사를 알던 모르던 생각나는 노래들을 죄다 부르며 한 걸음 한 걸음 내딛기 시작했다. 농노로 이어지는 카미노는 산과 들, 높은 지대에서 쏟아지는 빗물로 발목까지 차올라 조심조심 걸어야 했고 돌다리로 이어진 길은 아예 접근할 수 없어 돌아가야 했다. 군용차, 전기공사 차량이나 다닐 것 같은 높은 산길을 지날 때는 심장이 졸아드는 것 같아 거의 달리다시피 했다. 당이 툭 떨어질 때처럼 온몸에 힘이 빠져 현깃증이 일었다.

어느새 시야가 조금씩 밝아오고 저 멀리 작은 마을이 눈에 들어왔다. 아침을 거른 채 긴장했던 두 시간은 예닐곱 시간을 걸은 것만큼이나 길고 무거웠다. 마을 안에 바가 있기를, 문을 열었기를 기대한 채 가까이 가니 토요일에다 비가 쏟아진 날이어선지 마을이 통째 문을 걸어 잠근 듯 고요했다. 다시 힘을 짜내야 했다. 다음 마을까지 네 시간을 걸은 다음에야 문을 연 바를 만날 수 있었다. 구세주처럼 반가웠다. 중년의 주인장의 무뚝뚝함조차도. 비옷을 벗고 따듯한 커피로 몸을 데우고 긴장을 풀었다. 점점 비가 그치고 날이 개자 출발할 때의 두려움과 생경함도 걷히고 익숙한 걸음이 되돌아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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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그친 들판과 유칼립투스 숲을 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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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은 풍경들



지독한 냄새가 고스란히 풍겨오는 축사를 한동안 지나고 숲으로 들어서 큰 키의 유칼립투스 군락을 마주했다. 한 겹씩 껍질을 벗으며 바람의 방향대로 기울고 있었다. 잔뜩 움츠려 있던 어깨를 펴고 걸음을 멈춰 눈을 감았다. 그리고 바람을 탔다. 아, 유칼립투스의 흔들림, 여린 가지들이 만드는 바람의 결이 내 마음으로 가지런하게 들어오기 시작했다. 비 갠 후 달큰한 바람의 향기, 멈출 것 같지 않던 강한 비바람이 남긴 달콤한 평화로움이 발길을 붙잡았다. 유난히 많은 유칼립투스 숲에서 서다 걷다를 반복하며 40킬로미터를 가야 한다는 사실을 망각해 버리고 말았다. 결국 구글에 도움을 요청해 조금은 지름길, 조금은 위험한 도로를 걷을 수밖에 없었지만 아침나절의 묵직한 두려움을 상쇄하고도 남았다.

멀리 슬쩍 폼을 드러내는 바다, 내륙을 삼십일 넘게 걷다 보니 손바닥만 하게 보이는 바다가 오랜 친구처럼 흥겨웠다. 40킬로미터의 종점 쎄가 그곳에 있었다. 저절로 콧노래가 흥얼거려졌다.

쎄(Cee), 예정된 거리를 걸었다면 지나쳤을 도시, 도시 깊숙한 곳까지 바다를 들여 품고 따듯하게 고여있었다. 내게 주어진 것들을 버티고 견디고 충분히 겪어 냈을 때, 나아가 정해진 것들을 거부하고 비틀었을 때 비로소 다가오는 것들이었다.


20221029_183529.jpg 생일상



바로 바다 앞 예약된 숙소에 배낭을 풀었다. 친절한 호스피탈로가 현관과 방 열쇠를 주며 총총히 사라진 후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침대에 몸을 던졌다. 마지막 하루를 남겨두고 시원섭섭함이 우리 곁으로 바짝 다가와 있었다. 마냥 누워 있을 수만은 없어해 왔던 일들, 샤워, 빨래, 짐정리를 빛의 속도로 해 치우고 언제 비바람이 쳤냐 싶게 맑디 맑은 바다로 나갔다. 주말 해변에는 사람들이 붐비고 바다를 마주한 광장에는 삼삼오오 늦은 햇살이 모여 있었다. 내 생일 전야, 조금만 도울라 치면 '엄마 가만있어'를 반복하며 딸아이는 근사한 생일상을 차려냈다. 뭐니 뭐니 해도 내가 딸 하나는 잘 키웠다.


(22년 10월 29일, 토, 걷기 32일째, 41킬로미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