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산티아고 35. 쎄에서 피니스테라
90년대 초 한국 장애인복지계는 장애가 장애인 당사자의 문제가 아닌 사회와 환경문제라는 화두가 뜨거웠다. 이미 선진국에서는 사회모델을 넘어 장애인 당사자 위주의 인간중심모델로 진입했지만 한국에는 거의 30년 늦게 사회모델이 상륙한 것이다. 인식도 정책도 전달체계도 서비스도 모두 180도 바뀌어야 했다. 그렇게 30년을 넘게 장애인복지를 해 온 내가 그 아름다운 쎄에서의 아침, 이태원 참사를 접한 직후 내뱉은 말은
순간, 내 생각이 잘못됐구나 싶었고 아이의 표정도 굳어졌다.
아직도 내 머릿속의 지우개는 '니 탓이오'에서 '내 탓이오'로 30년째 건너오고 있었다. 마지막 날 16킬로미터, 바다도, 짧은 거리도 완벽한 날, 어느 날 보다 무거운 마음에 잠깐의 기도로 그들을 애도했다.
(당일 산티아고로 돌아와 저녁미사에 참례하러 갔을 때 배낭을 멘 채로는 성당에 들여보내주지 않았다. 사람이 많고 복잡하다는 이유였다. 움직이지 않고 미사를 드리는 곳에서도 안전을 위한 철저한 수칙이었다. 더욱 마음이 아픈 이유였다.)
쎄의 자궁 같은 둥근 해변을 돌아 마을 골목으로 들어섰다. 건물과 건물 사이 좁은 길로 바다가 불쑥 밀고 들어왔다. 순간의 대시를 놓치기 아쉬워 카메라에 담는다. 어쩌면 다시 만날 수 없을 것이었다. 이제는 오지 않을 것이라고, 더 이상 고생은 사지 않을 것이라 다짐했으므로.
따듯하고 잔잔하게 하룻밤을 품어준 쎄를 벗어나 산으로 올랐다. 오솔길, 산길을 지나니 저 멀리 피니스테라가 금세 모습을 드러낸다. 여느 날과 다름없이 도착해 버리기에는 설렘인지 아쉬움인지 벅참인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무엇이 마음에 가득 차올랐다. 먼 길을 걸어온 순례자들의 그런 마음을 아는지 쉼터가 마련되어 있었다. 배낭을 부리고 앉았다. 최종 목적지 그 바다를 앞에 두고, 왔던 길, 그 위의 생각들을 정리하기엔 안성맞춤이었다. 하긴 정리랄 것 까지도 없었다. 머릿속이 비었으므로. 단지 지나온 날의 들판, 힘듦, 어둠, 일출과 일몰, 건물, 길, 그리고 0.0킬로미터 지점, 그 종착지를 어떻게 맞을까, 대단할 것도 없는 그것들이 잔잔하게 마음에 일었다.
이정표처럼 길게 드리워진 긴 해변을 따라 피니스테라 시내로 들어갔다. 오래전 버스로 와서 그 주변만 맴돌다 돌아간 곳. 피니스테라가 이리 밝았구나, 이리 큰 광장, 많은 건물들, 카페들, 레스토랑들 그리고 사람들이 있었구나 처음 온 듯 천천히 훑으며 지나갔다. 종착지는 시내로부터 2.6킬로미터 정도 바다를 끼고 산길로 올라야 했는데 관광차량이 급속도로 많아졌다. 마음만큼 내 걸음도 갑자기 빨라진다. 9킬로미터, 5킬로미터... 점점 줄어드는 거리도 새삼스레 짙게 새겨졌다. 순례자들보다는 차로 온 관광객들이 더 많고 붐비는 바다를 배경으로 사람들이 줄을 서서 사진을 찍는 곳. 0.0킬로 이정표가 의연히 서 있었다. 울컥, 예상에 없었던 울음이 터졌다. 이번에는 아이가 내 등을 쓸어내렸다.
더 이상 내디딜 곳이 없는 땅끝 대서양을 마주하고 앉았다. 모든 출발이 어두웠고 조금 혹은 많은 비가 내렸으며 짧게는 20킬로미터 길게는 40킬로미터 넘는 거리를 걸었다. 산간이었고 돌길이었으며 들판이었으며 도로였다. 그리고 밀밭길이었다. 사람들은 따듯했고 안부를 물었으며 그 안부가 식기도 전에 헤어졌고 궁금해질 무렵 다시 만났다.
파도소리 정겨움에 취해 광활한 대서양을 마주하고 있으니 직전까지의 모든 순간이 포말처럼 사라진다.
아이는 순례길 내내 함께 한 조개껍데기를 십자가 앞에 올려놓고 나는 배낭 안에 소중히 간수했다. 혹 어떤 어려움이 찾아올 때 잊고 있었던 순례길을 조개껍데기로 기억하며 힘을 내기 위해서였다. 그날이 그날 같은 일상, 이전과 다를 것 없는 삶 속에서 또다시 지치고 힘들 때 조금은 다른 의미, 다른 향기, 다른 맛으로 받아들일 수 있지 않을까. 공식적으로는 868킬로미터의 길, 비공식적으로는 1000킬로 미터가량을 걸었던 기억이 오래오래 나와 동행할 터이니.
끝은 시작이다. 더 이상 내디딜 곳이 없다 해도 길은 만들면 될 것이므로.
(22년 10월 30일 일, 걷기 33일째, 16킬로미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