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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상 Apr 04. 2023

슬기로운 대표생활

 다들 모여봐요.

몇 안 되는 직원들이 대표실로 들어온다. 돌돌 말린 종이 스트로가 직원 수만큼 준비되어 있다. 주문을 외듯 두 손을 모은 막내 직원에게 웃음을 보내며 다시 한번 흔들어 섞는다. 스스로 순서를 정하여 하나씩 뽑은 직원들은 동시에 환호와 비명을 지른다. 사실 환호와 비명을 지를 것도 없는 작은 일이지만 종이에는 ‘당장 퇴근, 오후 네 시 퇴근, 내일 오후 한 시 출근, 하루특별 휴가, 꽝 등이 적혀 있었다. 설왕설래 직원들이 퇴근하기도 하고 네 시가 되기를 기다리기도 하고, 내일 한 시 출근의 기쁨을 미리 느끼는 시간이었다. 뜻밖의 이벤트를 마련한 날, 마음이야 커피값이라도 쥐어주고 싶은데 경제적 지원까지는 아직 어려운 게 한계다.


  산벚꽃들이 한 점 풍경화처럼 환한 날, 점심 후 모두 승합차에 올랐다. 짧지만 콧바람을 쐴 수 있는 잠깐의 외도다. 처음 본 듯  직원들의 감탄사를 듣다 보면 아주 작은 일로 한껏 생색을 내도 좋을 것 만 같은 흐뭇함에 빠진다. 봄 나무들의 새순과 산벚나무 들을 생생하게 재현하는 연못 둘레길을 사부작사부작 걷다 보면 모두의 마음에도 봄날처럼 온도가 올라간다.          


 제주도 연수 때였다. 세 명씩 한 조가 되어 미션을 수행하도록 했다. 바다낚시, 올레길 걷기, 드라이브 등등이다. 한 조가 될 직원들 이름까지 써 놨으니 평소 친하지 않았던 직원들과 친해질 수 있는 시간이 되기도 한다. 낚시조는 한 마리도 낚지 못했다고 아쉬워했지만 경험만으로도 흡족해했다. 올레길 걷기 조는 제주 속속 들여다보며 처음 걷는 길 위의 시간을 꽤나 만족해했다. 드라이브 중에 만났던 12월의 애기동백은 드라이브조원들의 몸과 맘에도 활짝 스며들었는데.


 김대표의 무대포 이벤트는 거의 1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처음으로 홍콩 연수를 갔을 때였다. 통째로 하루를 비워 이국에서의 두려움을 떨쳐내고 외국어의 중요성을 알게 하기 위해 혼자씩 여행하도록 계획을 짰다. 직원 수대로 마련된 스토로에는 유명 관광 지역이 적혀있었다. 뽑은 장소를 둘러보고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장소로 집결하는 것이었다. 드레곤스 백 트레킹, 섹오비치 다녀오기, 스탠리 베이 다녀오기, 침사추이 톺아보기, 홍콩공원을 샅샅이 돈 후 오래된 스타벅스에서 차 한잔 하기 등 직원들이 만나지 않도록 장소를 선정하고 동선을 짰다. 외국인에게 말 걸기, 외국인과 사진 찍어 대표에게 보내기 등의 추가 미션이 직원들에게 문자로 보내졌다. 김 대표도 직원들과 같이 스트로를 뽑아 미션을 동시에 수행했다. 그때 김대표가 뽑았던 미션은 섹오비치 다녀오기였는데 숙소에서 가장 먼 마을이었고 지하철을 타고 가다 어딘가에서 내려 버스로 갈아타고 들어가야 하는 바닷가마을이었다. 김대표 역시 두려웠고 길을 잘못 들면 어쩌나 하는 걱정으로 한층 긴장해야만 하는 미션이었다. 그렇게 만난 섹오라는 바닷가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커피까지 한 잔 한 후 돌아본 마을은 삼, 사십 분 정도면 충분했다.

  다시 시내로 나온 김대표는 유명서점으로 모이라는 문자를 보냈다. 각자가 있는 장소에서 지하철이나 택시를 타야 하거나 걸어도 되는 곳이었다.  직원들이 도착할 때쯤 김대표는 식당으로 자리를 옮긴 후 다시 문자를 보냈다. 그야말로 연수 중의 연수였다. 그날 저녁 일기를 쓰듯 소감을 나누며 어떤 직원은 눈물을 쏟기도 했다. 데이터나 와이파이가 시원찮은 때였으니 길 찾기, 교통편 알기 등이 얼마나 고달팠을지 알고도 남음이 있었다. 긴장의 정도가 여행의 맛을 진하게 하는 법, 참으로 직원들을 힘들게 하는 김대표였으나 잊을 수 없는 연수였다는 후문이 지금까지 돈다.


  늘 반복되는 일을 하면서 지치고 매너리즘에 빠지기 쉬운 때, 창의력도 고갈되고 일을 잘하고 있는지 의문이 쓱 마음에 차오를 때 뜻밖의 이벤트들은 청량음료처럼 시원해서 업무 효율도 높인다. 만만하지 않은 대표생활도 조금만 생각해 보면 슬기로운 대표 생활이 될 수 있다.    


  춘곤증이 밀려오는 이 봄날, 뽑기나 한 번 해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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