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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미술에 대한 고찰

송은 <제23회 송은미술대상>

by 김채미


바로크 미술 전시회를 관람한 후에 바로 현대 미술 전시장에 발을 들이니 더욱더 이질적이란 느낌이 들었다. 캔버스에 두껍게 칠해진 빛과 어둠의 대조, 사실적인 인물의 표정과 동작이 담긴 회화 작품을 보다가 고전적 미를 완전히 해체하고 테크놀로지와 결합된 새로운 시대의 미술 형태를 바라보니 몇 세기 만에 미술의 정의가 완전히 바뀌었다는 걸 실감할 수 있었다. 특히나 <송은미술대상> 전시회는 지금 현대 미술의 최전선에 있는 우리나라 작가들의 작품이 걸려있었으니 더욱 지금 여기에 '미술이란 무엇인지'에 대한 물음을 떠올리게 했다.


스무 명 가까이 되는 작가들의 작품에는 모두 테크놀로지가 접목되어 있었다. 도록의 맨 앞에 실린 심사평에서도 드러나듯이 평론가들과 기획자들, 작가들까지 '테크놀로지가 만연하고, 공존하는 이 시대에 미술은 어떤 형태를 취할 것이고, 어떻게 변모해 갈 것인가.'에 대한 물음을 끊임없이 제기하는 듯했다. 최전선에 있는 그들조차 하루가 다르게 변해가고 빨라지는 세상 속에서 무엇을 미술이라 정의하고 예술과 어떻게 연결고리를 찾아야 하는지 답을 찾고 있었다.


수십 개의 작품을 둘어보았을 때, 개인적으로는 아쉬운 점이 많았다. 물론 작가들의 작품이 오직 한 개씩만 전시되어 있어 심도 있는 주제나 그들 각각의 내러티브를 깊이 있게 알 수 없어서 아쉬운 면도 컸지만, 테크놀로지의 결합이 단순히 체험의 형태로 치중되어 있어서 더 아쉬움이 클 수밖에 없었다. 이제 실생활에서 기술을 너무 가까이 접하게 된 이상, 웬만한 기술력으로 관객을 놀라게 할 수 없다. 모두 예상 가능한 범위 안에 들어오고 만 것이다. 매트릭스나 아바타처럼 완전히 새로운 세계조차 컴퓨터 그래픽 요소로 구현하는 마당에 관객 참여형 형태의 작품이라고 하나, 이미 우리에게 너무나도 익숙한 기술이었다. 그 기술을 어떻게 새롭게 구현할 것인가. 예상 범위 외로 뻗어갈 것인가, 아니면 예상과 예측 가능한 범위 내에 있지만 이것을 어떻게 효과적으로 내러티브 한 인상을 관객들에게 줄 것인가의 쟁점에 놓인 게 아닐까.


기술을 예상 범위 외로 뻗어 나간다는 건 예술가의 입장에서는 너무 어려운 일이다. 이는 개발자의 일이니까. 그래서인지 이제 기술자와 예술가의 경계조차 모호해졌다. 컴퓨터 그래픽은 1인도 충분히 제작 가능한 범위 내로 프로그램이 발달하다 보니, 이번 <송은미술대상> 전시 작가들 중에 컴퓨터 그래픽을 전공을 하거나 아예 다른 전공의 사람들도 훨씬 많아졌다. 예술을 하고 싶다고 예술 대학을 졸업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컴퓨터 공학 전공, 영어영문학 전공, 식품영양학과 전공. 이처럼 전혀 접점이 없어 보이는 사람들조차 기술로 쉽게 재현할 수 있는 세상이 되다 보니 누구나 미술에 참여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현대 미술이란 무엇일까'에 대한 의문이 더 강하게 다가왔다. 바로 이전에 조았던 전시 <카라바조와 바로크 미술>에서는 모든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다녔다. 작가의 작품에 깊이 공감한다는 표시였다. 무엇이 아름다움이고 무엇이 멋있는지. 비록 몇 세기가 지났음에도 그 시대가 주창했던 아름다움에 이 시대의 사람들도 공감한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현대 미술은, 공감을 얻기가 무척 힘들다. 현대에 지금, 여기에 존재함에도 관객들은 현대 미술이 무엇을 말하는지 이해하지 못하고 거리는 삽시간에 멀어진다. 당장 내 주변만 해도 '나는 그런 건 잘 모르겠다, 전시에서 뭘 말하는 건지 이해가 안 간다, 그냥 하고 싶은 말 하고 대충 끼워 맞추는 거 아니냐.'라는 말을 하니까.


관객과 작품의 거리를 좀 더 좁힐 수 있는 현대적인 미는 없을까. 단순히 관객 참여형 테크놀로지가 아닌 마음을 건드리고, 깊이 있는 주제를 서로 공유할 수 있는 작품을 어떻게 만들어나가야 하는 걸까.


이번 전시에서 가장 인상이 깊었던 작품은 그 의문을 실제로 구현시킴에 가까운 탁영준 작가의 <월요일 날 첫눈에 똑떨어졌네>였다. 퀴어인 그의 정체성과 종교적 의문을 항상 가지고 있었던 그는 소설에서 영감을 받아 여성과 여성이 노르웨이의 낡은 목조 교회에서 무용으로 몸짓을 나누는 영상으로, 남성과 남성이 비행기 안과 외부에서 무용을 하는 것을 담아 감정을 폭발시켰다. 여태껏 전시에 걸린 영상 작품 중에 내 마음을 동요하게 만든 작품이 없었는데 처음으로 영상 작품을 집중해서 끝까지 볼 수밖에 없었다. 촬영한 영상의 구도, 퀄리티뿐 아니라 그 안에 충분히 내러티브가 담겨 있었다. 영어영문학 전공인 독특한 이력까지. 이런 방식이 새로운 시대에 필요한 미술적 요소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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