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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깃꼬깃한 영수증

2025.01.28

by 김채미

일 년 반 만에 만난 친척동생 H는 그새 어른이 된 것 같았다. 나와 고작 두 살 차이지만 이전에는 얼굴에 장난기가 가득했는데. 어느덧 회사 생활 3년 차에 접어들게 되다 보니 고민도 깊어지고, 쓴맛도 많이 느낀 모양이었다. 이야기는 어느덧 근황에 대한 이야기, 회사 생활 이야기에 대한 주제를 넘어 '현실성'에 대한 주제로 넘어가고 있었다. H는 "현실적이어야 하잖아. 아무래도."라며 '현실'이라는 단어를 자주 입에 올렸다.


"나보다도 어린데 너무 현실적으로 생각하는 거 아니야?"

내가 안타까움에 묻자 H는 의자를 뒤로 젖히면서 테이블에 놓인 나이프로 페스츄리를 건드렸다.

"아무래도 계속 생각하게 되더라고. 이전에는 이런 고민을 할 필요가 없었는데, '현실적'인 문제로 고민을 하게 되니까 끝도 없이 이어지더라. 실제로 그 말이 맞기도 하고. 현실적인 부분들을 고려해야 하잖아."

그 누구보다 현실성을 고려하는 내가, 친척동생의 입에서 '현실적인 부분'이라는 단어가 계속해서 흘러나오자 복잡한 마음이 일었다. 그래서 뒤이어 그렇지 않다고, 생각보다 현실은 현실성을 따지는 게 아니라 얼렁뚱땅 흘러가기도 한다며 여러 사례들을 제시하자 H도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너무 잘 알지. 그런 경우들도 있다는 게. 우리 형 봐봐. 그러니까 아무것도 모를 때 해야 해."

H보다 네 살 위, 나보다 두 살 위인 친척 오빠는 아주 이른 나이에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았다. 벌써 첫째가 아홉 살이니 예전으로 보나, 지금으로 보나 정말 일찍 결혼한 케이스였다.

"네가 바로 앞에서 너무 좋은 케이스를 봐서 그래. 티비 봐봐. 요즘 프로그램에 문제가 있다고 나오는 곳을 보며 너무 이른 나이에 성급하게 해서 후회된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잖아. 사람마다 다 다른 거지."

H는 그것도 맞다며 고개를 다시 한 번 끄덕였다. 이런 이야기를 우리가 하게 되다니 정말 어른 다 됐다, 라며 깔깔거리자 H는 불쑥 다시 질문을 던졌다.

"누나는 혼자서 여행도 잘 다니잖아, 그럴 때 외롭지 않아?"

H의 말을 듣고 바닐라 우유를 쪽 빨아들이며 곰곰이 생각을 했다.

"외로울 때도 있지만, 나는 다른 사람들보다 외로워하는 비중이 좀 적은 것 같더라고. 아무래도 아직 가족들이랑 같이 살고 있고, 평상시에는 너무 많은 사람을 만나잖아. 오히려 혼자서 보내는 시간이 필요하달까. 그래서 혼자 여행을 떠나는 것 같아. 그럴 때 온전히 나만 바라보는 시간을 가질 수 있으니까."

"난 그래서 누나가 참 대단하더라. 생각하면 그냥 하잖아. 부지런하게. 나는 게을러서 절대 못해."


여행에 대한 이야기를 이어 나가다 H는 재빠르게 핸드폰을 켜더니 누나 말 들으니까 안 되겠다, 이번 연휴 기니까 제주도나 다녀와야겠어, 라며 어플에 접속했다. 너도 실행력 빠르네, 하고 놀리자 그래서 가족인가 봐, 하고 H는 빠르게 비행기를 검색하기 시작했다.

H와 다시 회사 생활 이야기, 취미에 대한 이야기, 좋아하는 것을 찾아 몰두하고 싶다는 이야기, 돈과 취미 생활을 모두 선택할 수 없는 걸까, 란 이야기와 균형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나서 우리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영등포 타임스퀘어도 돌며 쇼핑도 하고, 서점에 들러 책을 서로 추천도 해주며 이르게 명절 느낌을 보냈다.

동생이 타는 전철이 먼저 와 배웅을 하고 주머니에 손을 넣자 꼬깃꼬깃해진 영수증이 잡혔다. 한기가 도는 역사 안에, 아마 우리와 같거나 비슷한 고민을 안고 있는 사람이 한가득일 거라 생각하면서 나는 다음 열차가 오고 있음을 알리는 전광판을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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