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접점이 없는 네 사람

2025.01.28

by 김채미

그렇게 친하지 않았던 중학교 동창 네 명이 꿈속에 나왔다. 나는 세 명의 친구들과 각각 같은 반을 한 적이 있었지만, 나를 뺀 세 명은 서로 같은 반인 적도 없었다. 꿈속에서 기본적으로 조용했지만 남들하고무던히 잘 어울렸고 나와도 종종 같은 방향으로 가면 함께 하교를 했었던 희와, 남자애지만 여자 이름을 가지고 있었던 진이, 열두 살 터울의 여동생이 있고 섬세했던 혁이가 나왔다. 중학교 졸업 이후로 연락을 한 적도 없고, 생각을 한 적도 없던 친구들이 뜬금없이 나와 꿈에서 깬 뒤로도 오래도록 멍한 기분이었다.


꿈속에서 나와 희는 학교 계단을 내려가고 있었다. 오른쪽 끝 벽에 설치된 긴 나무 받침대, 햐얗고 투박한 계단 사이에 박혀있는 검고 누런 조약돌 모양까지. 십오 년 전, 내가 중학교를 다녔던 그 시절 그대로 재현되어 있었다. 그 시절 희와 종종 나누었던 대화들, 내일까지 선생님이 이거 숙제해 오라고 했다, 수행평가 그거 너무 어렵다, 같은 이야기를 하며 내려가는데 혁이와 진이가 맞은편에서 계단을 올라오고 있었다. 자연스럽게 나는 혁이와 인사를 나누고 근황을 물었다. 중학교 때 교복을 입고서 현재를 물은 것이다.


목까지 잠그는 검은색 교복 마이와 하늘색 차이나 셔츠, 세련된 교복 디자인과는 거리가 먼 70년 대 부모님들이 입었을 법한 교복을 입고 혁이는 "요즘 어떻게 지내고 있냐? 잘 지내고 있지?" 라며 말을 걸어왔다. 중학교 졸업 이후로 상고에 진학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고, 그 시절 활발하게 활동했던 싸이월드를 통해 간간히 서로 업로드한 사진을 보며 댓글을 달았던 게 기억난 나는 "너 바느질 이제 엄청 잘하잖아. 그때 내가 댓글 달아서 너도 댓글 달고 그랬던 것 같은데."하고 이야기를 끄집어냈다. 그 애는 엄청 뿌듯하다는 얼굴을 하고 "나 엄청 열심히 공부해서 교대 갔다. 그때 다섯 개나 합격했어."라며 웃었다. 아주 환한 웃음이었다. 나는 "참 잘 됐네."하고 같이 환하게 웃으며 그간 이야기를 전해주었고, 혁이는 진이를 가리키면서 "우리 이제 가야 해."하고 손을 흔들며 복도 안으로 사라졌다.


신기했던 점은 세 사람과 그다지 친한 사이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특히나 혁이는 초등학교 때 같은 반이었지, 중학교 때는 같은 반이었던 적이 없었다. 복도에서 지나칠 때마다 가끔 인사를 하는 사이었을 뿐이었다. 진이와 희도 마찬가지였다. 같은 반이었던 적은 있었지만 진이하고는 용건이 있었을 때 말을 섞었다. 가량 시험을 보았을 때 이거 정답이 뭐냐, 숙제가 뭐였냐 따위의 이야기만 나누었을 뿐이었다. 희하고도 우연히 같은 방향으로 집에 가야 했을 때, 어디를 들려야 했을 때, 접점이 있는 친구들 사이에 함께 있게 되었을 때만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래서 중학교 졸업 이후 그 아이들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 아이들과 나 사이에 연결된 줄이 다른 친구들보다 무척 옅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회사에서 업무를 보는 와중에도 계속 꿈이 생각 나서 친한 팀장님에게 덜컥 엉뚱한 질문을 던졌다.

"팀장님은 꿈에 친하지 않았던 동창이 나온 적이 있으세요?"

"친하지 않은? 자연스럽게 연락이 끊겼지만 그 시절에는 친했었던 친구가 나온 적은 있는데, 친하지 않은 사람이 나온 적은 없었어. 아예 말도 안 섞은 사이였던 거야?"

"그건 아닌데, 연락 안 한지도 십오 년이 넘었고.. 졸업 이후로 생각해 본 적은 없었는데 꿈을 꾸어서요."

그러자 팀장님은 흐뭇하게 씩 웃었다.

"마음이 있었던 건 아니고?"

"그건 아니에요. 같은 반이었던 적은 있지만 마음이 있지 않았어요."

그러자 팀장님도 아리송한 표정을 지으며 신기하다고 입을 벌렸다.

"아니면 그 친구들이 채미 팀장을 갑자기 떠올렸다거나? 종종 그런 신기한 경험이 일어난다고 하잖아. 어떤 이유인지 잘 모르겠지만."

나는 다시 컴퓨터 모니터에 시선을 옮기고 이 기묘한 꿈을 되뇌며 앓는 소리를 냈다. 그런가. 곰곰이 어린 시절을 떠올려 보니 나는 지금이나 그때나 호기심이 많아 반 아이들 누구 하고도 쉽게 말을 섞고 놀며 지냈다. 아이들이 모두 궁금했다. 어떤 사람인지, 어떤 관심사를 가지고 있는지. 그래서 항상 반장을 자처하며 전혀 나와 접점이 없을 것 같은 아이들하고도 거리낌 없이 이야기하며 지냈다. 친밀함의 농도는 모두 달랐지만, 누구 하고도 편하게 말을 나누고 말을 걸었다. 어떤 이유에서인지 모르지만 정말 팀장님 말처럼 나를 한 번쯤 떠올렸던 걸까. 그래서 어느 순간 무의식의 세계가 연결된 것인지도 몰랐다. 그때 편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애가 있었지, 하고. 어린 시절 앳된 얼굴, 그 모습 그대로 나온 친구들을 만나게 해 준 꿈이 아련하고 아름다워서 나는 오래도록, 여운을 곱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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