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알리체 로르바케르 <키메라>
폐기물이 떠다니는 바닷가에서 이런 건 아무것도 아니라며 물속에 뛰어드는 친구들 사이로 아르투는 이상함을 느낀다. 여기가 옛날에 무덤이었대라는 한 여자 친구의 말에 아르투는 어지러움을 느끼고 모래 사변 한가운데에 주저앉는다. 물장구를 치던 친구들이 "또 왔나 봐! 야 아르투가 또 발견했어!"라고 소리를 지르며 아르투 주변으로 몰라가 미친 듯이 땅을 파기 시작한다. 그러자 누군가 한 번도 건들지 않은 것 같은 비밀스러운 문이 나오고, 그 안에 오랜 시간 잠들어 있던 유물들이 발견된다. 아르투와 친구들은 발목까지 차오른 물 위로 로마 시대 이전, 이탈리아 지역을 지배해 온 에트루니아인의 신전을 보고 놀라움을 감추지 못한다.
땅속에 있는 유물을 발견할 수 있는 신기한 능력을 지닌 아르투는 이 능력을 이용해서 친구들과 유물을 도굴하고 비싼 값에 팔아넘겨 돈을 얻으며 생활한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아르투는 바뀐 듯하다. 유물을 도굴하는데 기꺼이 응하지만, 유물을 팔고 돈을 크게 벌려는 친구들과 다르게 무심한 태도로 일관한다. 하지만 그 누구보다 유물을 찾는데 적극적이다. 무언가를 발견하고 싶다는 듯이.
그런 아르투의 욕망은 바닷가 앞에서 커다란 신전을 발견했을 때 도드라지게 나타난다. 한 친구가 유물을 지상으로 가져가기 위해 커다란 여신의 얼굴을 똑 자르자 분노하며 소리를 지르기 시작한 것이다. 당황한 친구는 도굴이란 원래 이런 거라고, 이렇게 커다란 건 그대로 들고 가기 어려우니 조각내어서 위로 가지고 가야 한다고, 감쪽같이 붙일 수 있다고 하지만 아르투는 분에 못 이겨 계속 씩씩거린다. 아름다웠던 여신의 얼굴. 그 얼굴에서 오래전 목숨을 잃은 여자친구 베니아미나의 얼굴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영화는 베니아미나가 왜 죽음에 이르게 된 것인지, 아르투와 어떤 사랑을 나누었는지는 일절 이야기하지 않는다. 다만 아르투가 계속해서 땅을 파고, 도굴을 찾고, 여러 사람을 만나는 장면 사이사이에 베니아미나와 함께 보냈던 행복했던 순간들을 짧게 넣을 뿐이다. 아주 찰나의 장면이지만, 그 장면 속에서 그 누구보다 행복한 모습을 짓고 있는 아르투를 보며 그녀와 보냈던 순간이 아름다웠음을 충분히 느낄 수 있다.
영화 속 중간중간에 등장하는 짧은 장면들은 베니아미나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누군가 캠코더로 찍은 듯한 아련한 영상미 안에 베니아미나는 계속 흙을 매만지며, 흙 주변을 맴돈다. 그러다 베니아미나가 입고 있던 붉은색 원피스에서 털실이 빠져나오는데, 기이하게도 털실이 흙에 묻혀 빠져나오지 않는다. 베니아미나는 계속 실을 잡아당기지만, 마치 마술쇼처럼 실이 끝없이 빠져나올 뿐 끝이 보이지 않는다. 비현실적인 장면의 등장에 갸우뚱해질 무렵, 현실 속에서 아르투의 이야기는 계속된다.
현실에서 아르투는 신전의 도굴을 부자 감별사 스파르타코에게 빼앗기고, 친구들은 그에 항의하기 위해 유일하게 들고 온 여신의 머리를 들고 간다. 유물의 주인이 누구인지, 누가 먼저 발견했는지 갈등이 벌어지는 가운데 아르투는 무언가 깨달았다는 듯이 "이건 인간이 보라고 만든 게 아니야."라고 외치며 여신의 머리를 바닷속으로 던져버린다. 사건 이후 친구들과 어긋나게 된 그는 다시 새로운 도굴꾼 모임의 부름을 받아 공사 현장에 바닥에 있는 작은 유물의 기운을 느낀다. 포크레인이 파낸 작은 구멍 안으로 들어간 아르투. 그때 흙이 무너지고 아르투는 어둠 속에 갇힌다. 주머니에 들어있던 작은 라이터를 꺼내 불을 켜자 눈앞에 무언가 흔들거린다. 가까이 다가가니 보이는 건 긴 붉은 실. 아르투는 붉은 실을 잡아당기며 실이 이끄는 곳으로 다가간다. 그러자 머리 위에 있던 흙 무더기가 무너져 작은 구멍이 생기고, 구멍에 손을 집어넣고 파헤쳐 지상 위로 올라온 아르투는 그가 그토록 찾았던 베니아미나를 만나 포옹을 하게 된다. 환상적이고 비현실적인 마지막 장면이 주는 깊은 여운 때문에 나는 한동안 자리에서 일어날 수 없었다.
감독 알리체 로르바케르는 '오르페우스 신화'에서 이 영화를 착안했다고 한다. 지하로 내려간 에우리디케를 지상으로 함께 데려가는 조건으로 절대 뒤를 돌아보아서는 안 된다는 금기를 어겨 다시 에우리디케가 지하세계로 내려가는 비극의 뒷 이야기를 땅속을 계속 파는 도굴꾼의 이야기로 풀어낸 것이다.
마지막 장면에서 아르투가 베니아미나를 만나는 장면은 환상적이다. 아르투가 죽음에 이른 것인지, 아니면 정신을 잃어 몽롱한 꿈 속에서 자신의 바람을 이룬 것인지 영화를 설명해주지 않는다. 다만, 우리는 어떤 형태로든 그가 그녀를 만나겠다는 욕망을 마지막에 이르러서야 깨닫게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자신이 왜 도굴에 집착을 하는지, 그 스스로조차 몰랐던 사실을 여신의 머리를 바다에 버려 '이것은 인간을 위한 것이 아니다.'라고 읊조리면서 깨닫게 된다. 스스로의 욕망에 마주 서고 깨닫게 된 것만으로도 아르투의 삶은 이전보다 지상으로 올라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