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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과 자본의 영혼 사이에 지어진 건축을 향하여

브래디 코베 <브루탈리스트>

by 김채미


건축의 역사는 언제부터 시작이라고 이야기해야 할까. 구석기 시대에 동굴부터? 그때도 인간은 거처를 만들기 위해 돌을 깎고 다듬었을 테니 건축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하지만 인간의 욕망이 건축에 본격적으로 발현되기 시작한 건 '재단'아닐까. 하늘의 계시를 가깝게 듣기 위해, 혹은 하늘과 더 가까워지기 위해. 욕망을 가장 큰 형태로 만들기 시작한 것이 바로 건축의 시작 아닐까. 대규모의 사람을 동원하고, 우리 지역에서 가장 커다란 지형을 차지하는 무언가를 만들고, 가장 아름다운 조각상을 세워두고. 인간의 여러 욕망을 한 군데에 모아둔 집약체야말로 건축이라고 이 영화는 보여주고 있다.


화면은 검은색 화면 속에 '서막'이라는 텍스트와 함께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이곳이 어디인지 관객들이 파악하기도 전에 긴장감 넘치는 사운드가 울려 퍼진다. 마치 오케스트라가 시작되기 전 악기들이 튜닝을 하는 것처럼 여러 악기들의 혼잡한 소음이 들려오다 멎어지며 똑똑 두들기는 규칙적인 마림바 소리가 자리 잡는다. 드디어 화면은 점점 선명해진다. 웅성거리는 사람들이 모습을 드러내고 주인공 라즐로 토스는 배가 도착했다는 소리를 들으며 빛을 향해 나아간다. 사람들과 부딪치기도 하고 빈 공간을 찾아 이리저리 앞으로 향해 나아가는 화면은 모두 한 번에, 원테이크로 이루어진다. 뒤이어 웅장한 금속 악기들이 사운드에 힘을 실어주고 거침없이 나아가는 라즐로 토스의 앞에 선명한 빛이 떠오른다. 그리고 라즐로 토스의 아내가 그에게 보낸 듯한 편지 속 구절이 내레이션이 되어 함께 섞이기 시작한다. 그의 아내는 '나와 조카 조피아는 다행히도 무사히 탈출하였고, 잘 지내고 있다. 당신 역시 살아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얼마나 보고 싶은지 모른다.'라며 차분히 말을 이어간다. 라즐로 토스는 배 밖으로 나와 미국에 도착한 것을 보고 그의 친구와 기쁨의 포옹을 하며 소리를 지른다. 그리고 화면에는 미국의 상징인 '자유의 여신상'이 거꾸로 뒤집힌 모습으로 가득 차며 사운드는 최고조에 이른다.


이 장면에서 얼마나 감탄했는지 모른다. 최고의 첫 장면이었다. '3시간 동안 어떻게 앉아서 영화를 다 봐야 하지'하고 생각했던 내 고민을 한 번에 날려준 첫 장면이었다. 그리고 뒤 이어 이어진 오프닝 시퀀스까지 눈을 뗄 수 없었다. 영상, 음악, 연출, 조명, 타이포그래피까지 모든 요소가 완벽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어서 장인이 한 땀 한 땀 세심하게 모든 것을 조각한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제1막에서 보여주는 라즐로 토스의 삶을 그야말로 비참하다. 사촌의 집에서 쫓겨난 라즐로는 노숙자들이 모여사는 공간을 배회하며 일용직 노동자로 겨우 살아간다. 그의 단면으로 인해 1950년대 미국의 모습이 적나라하게 비친다. 라디오를 통해 들리는 한국전쟁 이야기, 전쟁에서 겨우 벗어났나 싶었지만 미국에서 다시 전쟁 같은 삶을 살아가는 라즐로, 그리고 인종차별과 멸시를 받는 그의 흑인 동료, 전쟁이 일어나기 전 명망 있는 교수이자 건축가였지만 지금은 하루 먹고살기 바쁜 노동자로 살아가는 그의 모습을 통해 전쟁 아래 그 어떤 예술도, 고귀한 영혼도, 능력도, 재능도 빛을 바라버린다는 참담한 현실을 보여준다.


'두둑한 보수'라는 말은 영화 속에서 끊임없이 등장한다. '돈'은 라즐로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다. 자신의 아내 에르제벨과 조카 조피아에게 보내야 할 돈이며, 자신이 하루하루 먹고 살아나가야 한 생존의 수단이다. 더 나아가 '돈'은 미국 그 자체이기도 하다. 당시 그 어느 나라보다 자본주의의 선두에 있던 미국 자체를 나타내는 상징어이자, 라즐로가 앞으로 적응하고 살아남아야 할 땅인 것이다. 그 땅 위에 라즐로는 자신의 정체성을 세우기 위해 자신의 색깔이 담긴 건축물을 건설하는데 동의한다.


예술센터를 건설하는 프로젝트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면서 라즐로는 미국 사회에 더 깊숙이 들어가게 된다. 그리고 그가 겪었던 온갖 모욕과 치욕을 다시 한번 겪게 된다. 체육관과 도서관만 있으면 된다고 했던 말이, 지역 시장에게 잘 보이기 위해 반드시 가톨릭 예배당이 있어야 한다는 말로 바뀌고, 그의 처음 설계는 번번이 예산과 실용성이라는 말에 가로막혀 수정을 강요받고 험담을 듣는다. 그럼에도 라즐로는 입술을 깨물으며 프로젝트를 계속해서 시행한다. 그 어떤 모욕이라도 견뎌내고 미국 땅에서 반드시 살아남겠다는 다짐인 것이다. 그리고 해리슨은 그의 아내와 조카 역시 미국 땅으로 데리고 오는데 큰 역할을 한다. 자본이란 그의 에술적 영혼을 갈취하고 파괴하지만 동시에 그가 바라는 가족들과의 행복을 데려오기도 하는 존재인 것이다. 라즐로는 자본과 예술 그 사이에 자신의 영혼을 밀어넣고 애서 웃으며 생활하기로 한다. 이것이 올바른 길이라고 믿으면서.

그리스 신전, 이집트 피라미드, 마야 유적들, 수천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건축물을 제자리를 지키며 숨쉬고 살아간다. 라즐로는 그것을 원했다. 수많은 멸시와 모욕을 당할지라도, 전쟁의 자신의 삶을 파괴할지라도, 자신의 삶 그 자체를 새겨놓은 건축물을 만들고 완성한다면 사람들은 자신을 잊지 않을 것임을. 세상이 전쟁을 잊지 못할 것이고, 시간이 건축에 새겨질 것임을 믿고 고통을 쌓아올린 것이다.


영화를 실로 방대하다. 마치 한 편의 장편 소설을 읽은듯한 기분을 준다. 가상의 인물 '라즐로 토스'를 통해 건축 과정이 이어지면서 1950년부터 시작되는 세계의 격동기가 담기고 문화의 충돌과, 그 사이에 놓인 망명자들, 이방인들의 삶을 사실적으로 그려냈다. 그리고 이는 비단 역사 속 이야기만이 아니다. 지금도 계속되어 있다. 문화의 사이에 놓인 수많은 이민자들, 난민들, 역사와 전쟁이라는 소용돌이 속에서 살아가야 하는 수많은 이들의 삶을 대변하는 영화인 것이다. 이것이 1950년대에서 70년대 유행했던 단순한 형태의 콘크리트 구조물 건축 사조인 '브루탈리즘'의 생성과 이어짐으로 인해 멋지게 표현되고 있다.


예술의 영혼은 어느 지점에 있을까. 자본주의 사회에서 예술가의 영혼은 어디에 놓여야 하는가. 이는 영원한 숙제처럼 보인다. 돈과 예술을 뗄 수 없는 관계에 놓여있다. 에술가에게 사실 돈은 필요없다. 예술만으로도 기쁨을 누리니까. 하지만 돈이 없으면 예술가는 생존할 수 없고, 예술을 할 수 없다. 특히 건축의 경우, 수많은 자본이 들어가는데 이를 자본없이 세운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 그 현실을 너무나 잘 알기 때문에, 라즐로는, 예술가는 끊임없이 현실위에 놓인 자신의 영혼을 바라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영혼이 다치고 조각난다 할지라도, 자신의 삶이 담긴 예술을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자본에 숙이는 자. 하지만 마지막에 결국 남은 건, 라즐로의 건축이었던 것처럼 영혼의 승리는 라즐로에게 돌아갔다. 자본은 사라지지만, 예술은 영원하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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