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 가을밤 '기라델리'처럼
달콤한 인생이 시작되려나
배경 : VIP 고객들과 샌프란시스코 와인 여행
현선 : 32세 와인 수입사 마케팅팀 베테랑 팀장
태섭: 34세 절대미각을 자랑하는 까칠한 와인 전문 잡지사 기자,
주제 : 가벼운 오해로 미워하던 이와 S.F의 가을밤
도착할 때부터 얼이 빠져있었다. 20년 만에 찾아온 열흘간의 황금연휴에 고객과 출장이라니. 사장이 나를 지목해서 선심 쓰듯이 다녀오라고 할 때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게다가 샌프란시스코 공항 밖을 빠져나올 때 느껴지는 지릿한 바다 내음과 인천에서 보던 것을 뻥튀기해놓은 듯한 갈매기를 보면서 마음의 평화가 사라지고 있었다. 예전에 묵었던 호텔방에서 거대한 바퀴벌레를 보고 혼비백산한 이후 이곳 사람뿐만 아니라 동물들도 두려워하기 시작했고, 애꿎은 갈매기가 단지 크다는 이유로 나의 미움의 대상이 되었다.
사실 거품 빠진 사이다 같이 맥 빠진 출장길을 더욱 지치게 하는 것은 얼굴을 마주하고 싶지 않은 사람과 첫날부터 시간을 보내야 하기 때문이다. Travel & Wine 매거진의 태섭이 바로 그 사람이다. 쟁쟁한 사업가를 대상으로 하는 와인투어 첫날 시음회 디너 초청장을 그에게는 보내지 않았는데 어떻게 알고 라라 섬유 김 회장과 함께 명단에 올라 있었다.
그는 지난 수개월 전에 나를 궁지로 몰아세웠다. 요즘 핫한 필력으로 위세를 떨치는 그는 우리 회사가 어렵게 독점 공급하기로 한 소노마 레드와인에 대해 의구심을 자아내는 글을 매거진에 올렸다. 사전에 사실 확인 요청도 없이 말이다. 때문에 오랫동안 준비한 소노마 와인 론칭 행사는 출발하기도 전에 주저앉아 버렸었다.
조마조마했던 환영만찬이 성황리에 끝났다. 스타워즈 감독이 영화를 구상했다던 해안가 레스토랑이 좀 먹힌 모양이다. 몇몇 분들이 늦어진 골프행사로 저녁식사에 참석을 하지 못했지만 이 정도면 업계 메인 플레이어들에게 새로 출시할 와인에 대해 깊은 인상을 심어 준 샘이고, 이는 향후 일 년간 그들 소유의 프랜차이즈 레스토랑에서 상당한 매출로 나타날 것 같다.
다행스럽게도 껄끄럽던 태섭이 오늘은 찬물을 끼얹는 발언을 하지 않았다. 참석자들에게 기라델리 초콜릿 기프트 박스를 선물로 안겨드리면서 거나한 파티가 끝났다. 참석자들이 우버를 타고 분주히 사라지고, 어쩌다 보니 그와 함께 남게 되었다. 그는 윗 단추 하나를 푼 푸른색 셔츠와 발목 길이의 트렌디한 검은색 바지 차림이었는데, 편안하면서 세련돼 보였다.
말을 붙이기 싫었으나 이역만리 타국에 댕그라니 둘만 있다 보니 생겨난 최소한의 동포애로 먼저 말을 건넸다.
“차... 부르셨어요?”
“아뇨, 바닷바람이 좋아서 산책하면서 술 좀 깨고 들어가려고요. 호텔이 이쪽 방향이시죠? 저는 그 옆 호텔이에요. 차를 부르기도 좀 애매하고... 함께 가시죠~”
그가 한마디를 툭 던지고 앞서 걷기 시작했다.
길 따라 무성하게 자라난 풀들이 바람에 몸을 맡기고 흔들리고 있었다. 함께 걸으며 그에게 물었다.
“왜, 그러셨어요?”
“아니, 뭐…?”
“해가 서쪽에서 뜨겠어요. 오늘은 웬일로 저에게 우군이 되어 주셨네요.~”
“저 오늘은 그냥 가만히 있었는데요?”
“그러니까요. 가만히 계셔주시기만 하면 저한테 잘하시는 거예요. 앞으로도 쭉 그러시길 바라요”
“아~지난번 일 때문에 그러시는군요. 그때는 그럴만한 사정이 좀 있었어요. 그 얘기는 나중에 하고... 암튼 오늘 서빙된 와인은 꽤 셀렉션이 좋았어요. 팀장님이 하신 거죠? 레이건이 고르바쵸프와 마셨다는 오프닝 샴페인도 기억에 남구요. 마지막에 나왔던 거, 그거 소노마 와인 중에서도 이렇게 블렌딩 한 레드가 보르도 와인을 넘어서는 경험은 저도 몇 번 되지 않아요, 나이스 잡~”
“헐~ 덕담하실 때도 있네요. 역시 오래 살다 보니 별일이 다 있어요. 지난번 잡지에 내신 글 때문에 우리 매출이 꼬꾸라질번했어요. 당장 찾아가서 따지고 싶었지만 그러질 못했어요.”
“그 일은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어요. 아까 그 김 회장 말이에요. 최근에 와인 수입사를 만들었잖아요. 우리 편집장이 김 회장 편을 못 들어 안달하더라고요. 어릴 때 같은 마을에 살았데요. 나 원참~. 제가 쓰지도 않은 문장이 몇 개 추가됐어요. 저도 심하게 다퉜어요. 와인이 그 정도는 아니었는데, 그렇죠?. "
그의 변명을 듣고 있는데 시원한 가을바람이 알코올이 스며든 머릿결을 스치며 적의로 가득했던 내 마음을 누그러뜨리게 만드는 듯했다.
"흐음~그런 일이 있었군요. 그래도 그래서는 안 되는 거였죠! 안 그래요?"
그가 잠시 걸음을 멈추고는 겸연쩍어하는 얼굴로 자기의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음... 제가 죄송해서 연락도 못했어요. 저... 다음 달에 'Decanter'로 옮겨요. 본사가 여기이고 부모님도 여기 계셔서요. 더 이상은 남한테 휘둘리는 글을 쓰고 싶지 않아서요. 저랑 다툴 일은 없어질 듯해요. 후후. 그리고 그거 뭐였죠? 이번에 수입하신 워싱턴 리버 화이트, 언오크드(unoaked)였죠? 그거 참 좋던데요.”
“아~그러시군요. 잘됬네요. 다들 거기 들어가고 싶어 하던데. 미국 유학하신 분이 너무 작은 회사에 있다 싶었어요. 그 화이트 말이죠? 맞아요. 이번에 기대가 커요. 이번에는 초 치지 않을 거죠?”
“아유~ 절대... 저 원래 그런 사람 아니에요~”
어두운 거리 저편에 조그만 아이스크림 가게의 화려한 불빛이 확 눈에 들어왔다. 그가 고개를 획 돌리며 뭔가 보물이라도 본 듯이 말했다.
“와~기라델리가 여기도 있네요. 아이스크림 드실래요? 초콜릿이 많아서 술이 확 깰 거예요"
취기로 붉어진 얼굴을 들키고 싶지는 않았지만 시원하고 달콤한 디저트가 당겨서 그를 따라 들어갔다. 초콜릿 아이스크림을 콘에 휘청거릴 정도로 높이 쌓아서 들고 나오는데, 가게 앞에서 종이박스를 들고 동전을 구걸하던 흑인이 비틀거리며 나에게 위협적으로 다가왔다. 이때 뒤따라 나온 태섭이 그 노숙자를 막아서며 그의 오른손으로 내 어깨를 끌어안았다. 완강하지만 젠틀한 간격을 유지한 채 말이다. 건장한 태섭의 모습에 놀란 흑인은 뒤로 물러나며 횡설수설 떠들어대면서 사라진다.
"괜찮아요?"
“고마워요. 아~ 술이 확 깨버리네요. 아이스크림 안 먹어도 될 것 같아요”
“미안합니다. 제가 괜히 걷자고 했나 봐요. 이 동네가 밤에는 좀 위험해 보이네요. 호텔이 바로 저 앞이니 로비까지 모셔다 드릴게요"
술기운이 일시에 날아간 것은 노숙자 때문이 아니었다. 단편적인 원인에 기대어 누군가를 미워했던 깃털 같은 나의 가벼움, 혼자 짐작하고 혼자 불쾌감을 쏘아대던 나의 시선을 능청맞게 받아내며 잠시나마 제 역할을 했던 그의 착한 어깨, 휘청거리면서도 어떻게든 떨어뜨리지 않으려는 아이스크림에 대한 강렬한 집착 때문이었다. 그래 이건 술 때문이 아니라 달콤 시원한 아이스크림 때문이다. 이 사람의 미소가 조금씩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는 것은. 끼룩 거리며 날아가는 저 갈매기가 정다워 보이기는 처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