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멀리 시대에 뒤처진 은하계 서쪽 소용돌이의 끝, 지도에도 나와 있지 않은 그 변두리 지역에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작은 노란색 항성이 하나 있다. 이 항성의 북위 37도에 위치한 한반도는 길었던 겨울을 이겨내고 봄의 기지개를 켜고 있다. 반도의 남단 해남에서 연노랑색 산수유로 시작된 봄은 하동의 벚꽃 길을 분홍으로 물들이고 괴산 산막이옛길에서 미선나무 눈꽃을 폭발시키고 있다.
마곡사 하늘을 수놓은 형형색색 연등을 지나 삼신각 뒤쪽 낮은 언덕에는 애기똥풀이 실개천을 마주 보며 바람에 흔들리고 있다. 태섭은 노란색 꽃잎을 한참 바라보다 한송이를 꺾어 본다. 마치 끊어지는 고통을 표현하듯이 잘린 줄기의 끝에서 노란즙이 베어 나왔다. 줄기 끝에 송골송골 맺혀있는 옅은 노란색 즙이 건강한 아기의 똥을 닮아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알려준 현선을 떠올렸다. 그녀는 온갖 꽃과 나무에 관심이 많았다. 지난 몇 년간 그녀와 나누었던 말, 텍스트, 눈빛이 모두 알알이 박제된 채로 내 기억 속에서 소멸되지 않고 있다.
그녀를 다시 만난 곳은 재즈가 흘러나오는 카페였다. 아마도 죤 콜트레인의 'Blue Train'이었을 거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곡 중 하나이기도 했지만 이 곡을 들으며 상상했던 바로 그런 사람을 다시 만났기 때문에 잊을 수가 없다. 아무도 귀 기울여 듣지 않는 잔잔한 멜로디가 흐르고 있었고, 그녀는 생각보다 빨리 왔는지 벌써 한 잔을 마시고 있었다. 루뒤몽의 샹볼 뮤지니... 알프스 언덕에 핀 작은 들꽃에서 은은하게 풍겨 나는 향과 같은 섬세한 와인이다. 샌프란시스코의 가을밤에 그녀와 호텔 로비에서 함께 마셨던 와인이다. 마치 끊어질 듯 이어지는 우리의 언어와 몸짓이 빗어낸 술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고개를 갸우뚱하며 와인 향기를 맡고 있던 그녀가 나를 발견하고는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다.
"아니?... 와... 언제 한국에 오셨어요? 한 삼 년 됐나요? 샌프란에서 뵀던 게"
"영영 안 올 줄 알았나 보죠? 현선 씨 보러 왔어요"
"아이고, 입에 침도 안 바르고 이렇게 거짓말을 해요. 흠, 암튼 듣기 싫지는 않네요. 회사 그만두고 UC Davis에서 양조학을 배운다고 하셨잖아요. 뭐 와인업계의 사관학교라며... 그런데 난 태섭 씨가 와인하고 사랑에 빠져 영영 나파밸리를 벗어나지 못하실 줄 알았어요"
"아이 별말씀을, 저 지난주에 완전히 들어왔어요. K대학에 자리가 나서 이젠 이곳에 정착하려고요. 사실은 현선 씨 더 자주 뵐 수 있을 거 같아서 그곳의 학교 자리는 걷어찼어요"
"그래도 이렇게 갑자기 소리 소문 없이 들어오시는 거 반칙 아니에요? 저쪽 나라에 계실 줄 알았는데 갑자기 연락 보자고 해서 무슨 일인가 했어요."
"사실 깜짝 놀라게 하려고 그런 건데... 여기 분위기 좋죠? 오랜만에 저 보니까 좋지 않으세요?"
"아니... 놀라게 하려면 한 삼십 년쯤 있다가 들어오지 그랬어요?"
"왜 그러세요. 제가 꾸준히 연락드렸잖아요. 요즘 같은 시대에 페북 하면서 트위터 하면서 거의 같은 공간에 있는 거나 마찬가지라 생각하면서 제가 한국 다시 들어올 날만 손꼽아 기다렸어요."
"그런 사람이 그동안 그렇게 얼굴 한번 안보여주고 은둔생활을 하셨어요? 페북에서는 좋아요 눌러준 거 말고는 저한테 해주신 게 없는 걸로 아는데요"
"아, 그렇지... 공부하는 거 하고 아프신 부모님 병간호 말고는 다른 것에 신경을 쓸 여유가 없었어요. 다행히 부모님도 건강을 회복하셨고, 제가 그곳을 떠나도 될 것 같은 상황이 된 거죠"
"자, 일단 한잔 받으세요. 부모님 일은 잘 돼서 다행이고요. 그곳은 연중 내내 가을이죠? 한국은 이제 봄이에요."
"맞아요. 올림픽도로 지나가면서 응봉산을 보니 온통 노란색 개나리로 덮여있더라고요."
"노란색 꽃이 하나 더 있는데, 음... 애기똥풀이라는 꽃 알아요? 지금쯤이면 마곡사 뒤 언덕을 뒤덮고 있을 거예요. 화려하지는 않지만 소박한 아름다움이 있는 꽃이죠."
빙빙 돌리던 잔을 멈추고 와인을 들이키려던 태섭은 잔을 내려놓으며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제가 세상 일은 다 알아도 꽃이나 식물에 대해서는 잼병이에요. 그런데 왜 뜬금없이 꽃 이야기예요? 사람 기죽게"
"고대 그리스 신화에서 눈에 이물질이 많아 눈을 뜨지 못한 채 태어난 아기제비가 있었는데, 이때 어미 제비가 이 꽃의 줄기를 입으로 꺾어 거기서 나오는 유액으로 어린 아기 제비의 눈을 씻어 주었데요. 이 꽃을 구하기 위해 뱀과 싸우다 희생된 어미 제비의 이야기 때문에, 꽃말은 '몰래 주는 사랑'이래요. 아~ 이 말을 이렇게 해야 하나? 아~ 자존심 상해... 못 들은 걸로 하세요. 나, 갈래요~"
핸드백을 들고 의자에서 일어서려는 현선의 손목을 태섭이 황급히 낚아채며 물었다.
"마곡사라고 하셨나요? 내일 같이 갈래요?"
현선의 표정이 밝아지며 봄기운이 확 느껴졌다.
"한 잔 주시면서 물어보세요. 아까부터 잔 비어 있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