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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ugo Oct 31. 2019

청춘의 전투식량-제육 쌈밥


오전에 프로젝트 팀원들과 발표 준비를 했다. 내 아지트로 팀원들을 소집했기 때문에 미리 장소에 도착해서 모니터 같은 시각 도구들을 살펴보아야 했다. 종종걸음으로 서둘러 이동하느라 학교 정문부터 찰랑거리는 멋진 가을 단풍을 그냥 스쳐 지나갔다. 


각자가 작업해 온 내용을 공유하면서 이틀 남은 중간발표회에 사용할 슬라이드를 가다듬었다. 서로 죽이 잘 맞아서 척하면 척 알아들었다. 길게 이야기하지 않아도 서로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 환상의 팀임을 입증하는 순간이었다. 어느덧 12시를 훌쩍 넘겨 치열했던 미팅을 마무리한 후 팀 런치를 하기 위해 교문으로 향했다. 등교... 학교는 등산과 같이 오르는 것이고 학교를 나오는 것을 '하교'라고 한다. 학교가 존경의 대상이 되는 공간임을 뜻하는 것이 아닐까. 학교에 올라가며(등교) 못 본 단풍을 내려가며(하교) 보았다.  


멀리 초행길을 와준 팀원들과 무엇을 먹을까 하다가 제육쌈밥집이 눈에 확 들어왔다. 야채를 좋아하는 사람도 제육을 좋아하는 사람도 무난하게 먹을 수 있는 메뉴 같이 느껴졌다. 하지만 대학교 앞 식당인지라 살짝 리스크가 느껴졌다. 소위 질보다는 양을 표방하며 고기에 굶주린 대학생들에게 어필하는 식당이 아닌가 해서였다.


세명이 7,500원짜리 쌈밥을 주문하면서 고기를 2인분 추가(6,000원)로 주문했다. 결국 인당 만원 꼴이 되었다. 상추와 신선초가 푸짐하게 먼저 나왔고, 뚝배기에 계란찜이 바글바글 끊으며 등장했다. 오늘의 주인공 제육님은 넉넉한 주인의 인심이 담겨 한 접시 그득하게 휘날레를 장식하였다. 적당한 불맛과 적당한 매운맛, 육질과 비계 부분이 조화롭게 하나의 슬라이스를 나누어 장식하고 있었고 그 위에 참깨가 주방장의 마지막 정성을 상징하고 있었다.  


대한민국 청춘남녀 99%가 좋아할 것 같은 그 제육볶음이다. 제육볶음의 '제'는 알려지다시피 돼지를 의미하는 '저()'가 변형된 말이다. 하지만 'All'을 의미하는 '제()'라는 느낌이 들어서 마치 '세상의 모든 고기를 볶아 놓은' 것 같은 충만함을 주기도 한다.  나는 대학생 때 제대로 된 사정도 모르면서 제육볶음은 왜 허구한 날 돼지고기만 주는지 의문을 품은 적도 있다.  한 때 나의 메니져는 점심때 밥 먹으러 가자는 말 대신에 '전투 짜장'하러 가자고 말하곤 했다. 이후 사장님과 점심 먹을 일이 많아졌을 때에는 그것이 '전투 순댓국'으로 이름이 살짝 바뀌었다.


신선한 상추나 쌉싸름한 겨자잎에 밥 한술에 제육볶음을 올려서 입을 한껏 벌려서 집어넣고 나면 오전에 있었던 치열한 삶에 대한 위안이 되기에 충분하다. 붉은색 소스는 톡 쏘듯이 매콤하지만 고기의 푸근하고 기름진 맛이 조화가 무엇인지 알려준다. 그래도 좀 맵다 싶으면 시키지 않아도 나오는 계란찜을 한술 크게 떠먹으면 된다.


드립 커피 한 잔 값에 속이 이처럼 든든해질 수 있단 말인가. 예전에 인턴사원들 십여 명과 점심식사 후 커피를 마시며  제일 좋아하는 음식이 뭔지 물어본 적이 있다. 예외 없이 그냥 '고기'면 된다고 했다. 지금은 청춘이 가장 원하는 '고기'를 저렴하고 풍부하게 주는 '전투 제육쌈밥'이 대한민국의 미래를 밝히는 전투식량이 아닌가 싶다.


그 전투식량에는 그들이 피를 말리는 전투 중에 떨어뜨린 '학점', '시험', '리포트', '입사지원서', '첫사랑' 같은 파편들이 함께 녹아져 있는 것 같아 마음이 아련하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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