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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ugo Oct 15. 2019

스콘(Scone) 찬미

나른한 오후의 위안


우두커니 앉아 정신없이 보낸 하루를 돌아보다 보니 야심한 밤이 찾아왔다. 오늘은 어쩐 일인지 라면 한 젓가락보다 스콘 한 조각이 먹고 싶어 진다. 오십 년 넘게 토종 입맛으로 살아온 나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걸까? 


지난 추석 때 티브이를 보다가 충동적으로 만든 스콘이 생각지 않게 뜨거운 반응을 일으켰다. 좀처럼 내가 만든 음식에 대해 점수를 주지 않던 아내와 딸이 오븐에서 금방 꺼내 김이 모락모락 나는 스콘에 대해 엄지 척을 한 것이다.


사실 스콘이 기억 속 한가운데 깊이 자리 잡은 것은 지난 6월경이다. 제주도 올레길 여행 마지막 날 10코스 송악산 절경을 보고 내려오는 길에 갑자기 후드득 떨어지는 비를 만나게 되었는데, 생각할 겨를 없이 바로 눈 앞에 있는 스타벅스에 들어가게 되었다. 비를 피해 들어온 많은 여행객에 섞여 앉아 번잡스러운 분위기에서 커피를 마시게 되었다. 커피와 함께 따듯한 스콘 두 개를 네 명이 나누어 먹었다. 향긋한 버터향이 빵에 인색한 점수를 주는 내 영혼에 날갯짓을 하며 날아들었다. 반토막 짜리 스콘의 기억이 점점 커져만 갔지만 만들어 먹을 수 있는 거라는 생각은 아예 하지 않았다.  


언제부터인지 내가 음식을 하겠다고 덤벼들면 가족들은 보나 마나 또 사고나 치겠지 하는 표정으로 내가 만들어낼 비정상 음식 뒤에 먹을 정상 음식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이번에도 다르지 않았다. 연휴 첫날 오후에 갑자기 빵을 굽겠다고 호들갑을 떠는 나를 가족들은 애써 모른 척했다.


필요한 재료를 살펴보니 다행스럽게도 몇 가지 핵심 재료가 있어서 생크림만 사 오면 되는 상황이었다. 제일 먼저 오래전에 빵을 만든다며 사놓기만 하고 처박아 둔 저울을 꺼내었다. 먼지가 뽀얗게 앉아 있었다. 그동안 제 머리 위에 아무것도 올리지 못한 채 비닐봉지 안에 봉인되어 있었다. 네이버 검색의 첫 게시물에 나온 레시피를 따라 만들었다. 강력분 밀가루를 채에 받쳐서 탈탈 털어내며 밀가루 입자 사이에 공기가 들어가게 한 후 설탕과 우유와 생크림 그리고 적당량의 버터와 치즈가 아낌없이 투입하여 반죽을 하였다. 바질과 크렌베리를 함께 넣었다. 다만 버터와 치즈가 반죽 사이에서 녹아서 형체를 잃지 않게 냉장상태에서 빠른 시간 안에 반죽을 마쳐야 했다.


제주도의 황홀했던 스콘을 떠올리며 조선의 임금님이 강화도에 피난 갔다가 먹었다는 도루묵일까 하는 의구심으로 스콘을 굽기 시작했다. 20분 후 오븐에서 꺼낸 나의 첫 스콘은 구수한 버터향과 바질의 톡 쏘는 허브 향을 마구 뿜어내고 있었다. 그래도 고향이 영국인 빵인지라 우려낸 홍차와 함께 먹으니 궁합이 그만이었다. 겉은 바삭하고 속에는 습기가 남아 있어 마치 미디엄으로 구운 스테이크와 같은 느낌이 들기도 했다.


한 입을 베어 먹으면서 파편같이 떨어져 내리는 마른 빵가루를 추릅 거리며 공중 흡입을 하며 빨아들이다 보면 홍차가 당긴다. 차 한 모금으로 입을 축이고 나면 나면 다시 푸석한 스콘으로 손이 가고 결국 스콘이 없어질 때까지 무한반복 사이클이 돌게 된다. 맥주와 마른안주와의 상호작용과 같다. 한 번에 구워 내는 양이 여덟 개 밖에 안되어 가족이 모여 앉아 먹다 보면 금세 없어지고 만다. 한두 개 남겨두었다가 와인과 먹으려 했지만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성질 급한 한국인이 집에서 발효 빵을 만드는 것은 많은 인내심을 필요로 한다. 발효과정 없이 반죽해서 바로 구워 먹을 수 있는 스콘은 차를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딱 좋은 오후의 간식이다. 아궁이에서 군고구마 굽듯이 쭈그리고 앉아서 오븐 속의 빵 반죽이 갈색으로 변해가는 과정을 지켜보는 재미도 삼삼하다. 오븐 위로 구운 바질향이 새어 나와 코 끝을 간지럽힌다. 하루 종일 LCD 화면만 바라보던 눈이 편안해지는 아날로그 체험이다. 맛 좋은 스콘과 홍차의 맛과 가족 간의 대화는 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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