삐리릭 소리에 힘겹게 잠자리에서 기어 나와 옷을 주섬주섬 입었다. 헝클어진 머리를 숨기기 위해 모자가 달린 외투를 입고 동네 한 바퀴. 간밤에 옆 아파트 정문 근처에 세워둔 차를 옮기기 위해서다. 무슨 이유인지 동네 주민의 이면도로 차량에 대해서도 주차요원이 딱지를 붙이기 시작했다는 풍문 때문이다. 좁은 주차공간, 책과 잡동사니로 가득 차 이불을 펼칠 공간이 겨우 나오는 작은 방. 이와는 대조적으로 일거리로 가득 찬 가방과 베란다에 차고 넘치는 플라스틱 쓰레기와 신문지.
그렇다. 나는 도시에 살고 있다. 번잡스럽고 혼잡하며 긴장감이 넘친다. 한적한 시골 아침 닭이 깨우는 아침 공기와 개 짖는 소리와 밥 짓는 하얀 연기가 문득 그리워진다. 언제나 나의 아침을 열어주는 KBS 제1 라디오 93.1은 오늘은 하나도 수신이 안된다. 93.9 기독교방송도 지지거리는 잡음만이 거실을 가득 채운다. 내가 숨 쉴 공간은 도대체 어디에 있을까?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았던 CD플레이어에 음반을 걸어 넣어본다. Mstislav Rostropovich의 컬랙션 음반이다. 바흐 무반주 첼로 모음곡부터 시작해서 하이든 첼로 협주곡으로 이어지며 물흐르듯한 선율이 실내를 가득 채우고 흘러넘쳐 내 영혼을 어루만지기 시작한다.
마치 남쪽으로 난 창가에 어머니 무릎을 베고 누워 내 등을 토닥거리는 어머니의 손길과도 같다. '천의무봉(天衣無縫)'과 같다. '괜챦아 괜챦아 다 잘될거야'라고 귓가에 속삭이는 듯 하다. 변화무쌍하되 이어 붙인 데가 없는 선녀의 옷과 같다. 연주자의 심성이 그대로 전달되는 듯하다.
오늘 들은 로스트로포비치가 어머니와 같다면, 강철같은 야노스 슈타커는 아버지, 귀공자 청년 피터 비스펠베이는 나이 어린 사촌 형, 언제난 품격있는 피에르 푸르니에는 동네 부잣집 신사, 시골아저씨 안너 빌스마는 푸근한 쌀가게 아저씨(하지만 아마도 채식주의자) 같다. 같은 곡을 연주한 다양한 연주자의 다채로운 개성을 경험하는 재미가 클래식이 주는 특별한 선물이 아닐까 싶다.
P.S. :
새해에는 어김없이 오스트리아 빈에서 신년음악회가 열린다. 올해는 보스턴 교향악단의 음악감독이자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관현악단의 카펠 마이스터인 안드리스 넬슨스가 지휘를 맡았다고 한다. 예전에 본 여행상품 중에 빈 신년음악회 참석 프로그램이 있었는데 충격적인 가격이 아직도 기억에 남아 있다. 무려 천이백만 원이었다. 음악 애호가라면 이 금액을 지불하고라도 일생에 한 번은 실황연주를 지켜보고 싶을 수도 있다. 와인 애호가가 구천만 원짜리 로마네 꽁띠를 탐내는 것과도 같을 것이다. 내가 2020년 신년에 경험한 호사는 무엇일까? 무언가 문화적인 이정표를 찍는 경험을 하고 싶다. 굳이 생각해보자면 세상의 모든 음악을 들을 수 있는 튜너를 업그레이드하는 일일 것이다. 한번 저질러 볼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