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9년 6월. 어느덧 63세이다. 여름에는 작은 방에서 혼자 잠을 잔다. 유독 나만 좋아하는 모기 놈들 때문에 모기장 안에서 잠을 자야하기 때문이다. 눈 뜨자마자 혈압을 체크 해본다. 지난 10년간 지속한 채식주의 식단 때문인지 혈압이나 당뇨는 크게 걱정할 단계에서 안심할 단계로 접어들었다. 술도 끊으면 좋다지만 와인은 못 끊겠다. 마시는 횟수를 줄이기는 했지만 일 년에 몇 번 기분 좋은 날에는 안 마실 수 없다. 어제 밤 딸아이의 회사가 오랜 적자 끝에 드디어 이익을 내기 시작했다는 기쁜 소식은 와인을 부르는 천사의 노랫소리같이 들렸다. 오랜만에 좋은 와인을 꺼내 마셨지만 모두들 과음을 삼가는 분위기인지라 처형네 식구를 포함한 6명이 두 병으로 선방했다. 좋은 와인을 딸 때마다 영화 'Side Ways'에 나오는 대사를 떠올린다.
”가장 아끼는 슈발블랑 61년산을 언제 마실 거니?“
”아주 특별한 날 마실 거야“
”그 어떤 날이라도 그 와인을 마시는 날이 특별한 날이 될 거야“
결국 영화의 주인공은 그가 바라는 특별한 날은 오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평범한 날 그 와인을 오픈하게 된다. 그렇다. 진정한 특별한 날은 밖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내가 새로운 눈으로 이제껏 보지 못한 것을 발견하는 날이 특별한 날이다. 나는 오늘 하루를 어떤 특별한 날로 만들어볼까 하면서 하루를 시작한다.
아침잠이 많은 아내가 별일 없이 잘 자고 있는지 잠시 확인한 후 혼자 간단하게 아침을 챙겨 먹고 요가 수업을 다녀온다. 처음에는 다리 벌리기가 너무 안 되어 창피하기도 했는데 이제는 요가 선생님 다음으로 아름다운 각도를 만들어 내고 있어서 자랑스럽다. 오늘은 스마트시티를 연구하는 스터디 그룹 모임이 있다. 30분 정도 기조 발재를 해야 하는데 외국인 방문객들을 위해 영어로 발표해야 하는 것이 오늘의 도전과제다. 하지만 지난달에 샌프란시스코에서 진행했던 발표보다는 어려운 상황은 아니라 크게 긴장하지는 않는다.
걸어서 출퇴근하는 총장님 덕에 나도 학교 출근을 걸어서 하고 있다. 처음에는 그의 행동에 대해 툴툴 거렸지만 막상 해보니 건강에도 좋고 생각할 시간도 생겨서 나름 해볼 만한 일이다. 학교로 향하는 버스에서 멜론 라디오를 듣는다. 음악전문가가 나와서 클래식 음악에 대한 해설과 함께 명곡을 들려주어서 자주 듣게 된다.
지난주에 만난 대학교 동기들은 마치 골프를 치기 위해 세상에 태어난 것 같아 보였다. 태국이며 하와이며 해외에 나가서 골프를 친 무용담을 어린아이 소풍 다녀온 듯이 쏟아내었다. 그들의 기분을 맞추어주느라 맞장구는 쳤지만 나는 기본적으로 골프나 해외여행 자체를 크게 가슴 설레어하지는 않는 편이다. 사진 공부할 때 좋아했던 이탈리아의 화가 조르조 모란디의 삶에 깊이 감화를 받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는 피렌체의 조그마한 아파트에서 누이들과 함께 살면서 침실이자 작업실에서 평생을 보낸 사람이다. 동네 벼룩시장에서 사 온 여러 가지 모양의 병을 다양한 배치와 색감으로 나타내어 그만의 예술세계를 구축한 위대한 은둔의 화가이다. 누가 그에게 다른 화가들처럼 온 세상을 누비지 않아서 작품이 단조롭다고 말할 수 있을까? 문제는 생각의 유연성이다.
나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었다. 소박하고 검소한 삶 속에서 불필요한 것들을 최소화하고 꼭 필요한 것들만 소유하며 완벽하지는 않지만 내 스타일의 미니멀리즘을 완성하고 싶었다. 그래서 돈을 적게 벌어도 굳이 해외여행을 가지 않아도 유행하는 좋은 옷을 사 입지 않더라도 영위되는 그런 삶을 살고 싶었다. 월급이 줄어드는 만큼 늘어난 시간을 활용하여 내 손으로 간단한 티셔츠, 목도리, 짧은 바지, 차렵이불 같은 것은 재봉틀로 만들 수 있게 되었다.
밤에는 조용한 음악을 들으며 책을 읽는다. 집이 좁기도 하지만 종이 사용량을 줄이기 위해서 전자책을 주로 사용한다. 진공관 오디오는 전력 소모가 너무 많아서 작은 규모의 트랜지스터 앰프로 바꾸었다. '연구실 창밖 바로 눈앞에 다가드는 산 그림자가 희부옇게 저녁 안개로 가려질 무렵이 되어야 비로소 내 시간을 찾는다 이때 문득 책상 위에 놓인 트랜지스터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귀에 익은 음악. 어떤 값진 오디오 장치가 이러한 감동적인 순간을 만들어 줄 수가 있겠는가!' 작고하신 우리나라 클래식 평론가 1세대 안동림 교수께서 클래식 음악 애호가의 교과서라 불리는 도서 '이 한 장의 명반' 서문에 밝히셨듯이 가장 중요한 것은 최고급 오디오가 아니라 내가 갖고 있는 콘텐츠(앨범, 음악에 대한 소양)이다. 집이나 승용차와 같이 내 삶을 담는 외형적인 것보다는 무엇을 담을 것인가에 관심을 기울이려고 한다.
비록 태어나서 지금까지 화장실이 한 개만 있는 작은 집에 살고 있지만, 창을 열면 방긋 미소 짓는 목련나무와 라일락이 나를 행복하게 만든다. 화려하지는 않지만 건강에 좋은 홈 메이드 음식을 먹고 내 손으로 만든 가구와 옷을 소비하며 아름다운 글과 음악으로 진정한 기쁨을 누릴 수 있는 지금, 난 행복하다.
(10년 후 미래모습을 잠시 들여다 본 것입니다. 꼭 이렇게 되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