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설희 시인의 시집 ‘꽃은 바퀴다’를 읽다가 가슴을 울리는 시를 발견하고 제 느낌을 기록하려고 했는데, 해보지 않은 일인지라 용기가 필요했습니다. 저의 일천한 몇 번의 야생화 촬영 경험을 떠올리며 제 머리를 스치는 생각을 간단하게 적어보았습니다. 일전에 본 오래된 이탈리아 영화 ‘우편배달부(il Postino)’의 대사가 떠올랐습니다.
“시는 시를 쓴 사람의 것이 아니라 시를 필요로 하는 사람의 것이다”
-첫사랑에 빠진 우편배달부 마리오가 자신의 시를 허락도 없이 사용했다고 나무라는 위대한 시인 네루다에게 한 말.
아래의 시, ‘야생화 출사’는 저의 것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러니 감사의 말씀을 드리지 않을 수 없는 상황입니다. 박설희 시인께 감사드립니다.
청춘은 그들이 피어나는 꽃이기에 꽃보다는 화려한 쇼윈도나 디지털 세상에 온 정신을 빼앗기게 되지요. 자의이든 타의이든 ‘일생의 노역에서 벗어난’ 초로의 사진사님들은 그야말로 야생화입니다. 일을 멈추는 순간부터 세찬 바람이 부는 한겨울 그늘 밑에 혼자 덩그러니 피어있는 꽃과 같습니다. ‘비탈을 기어오르는’ 노익장을 보이며 열정을 불사릅니다.
청노루귀나 변산바람꽃, 동강할미꽃을 찾으러 다닐 때 ‘안력’을 돋우지 않을 수 없습니다. 돌 틈, 나무 밑동에 숨어 있는 새끼손가락보다 작은 꽃들을 발견하지 못하고 지나치기 십상이기 때문이죠. 설령 찾았다 하더라도, 이때만큼 안경과 내 호흡이 거추장스러울 때가 없습니다. 안경 너머로 거울을 지나 렌즈를 지나고도 공기를 뚫고 지나가야 노다지들이 가물가물 보이기 시작할 테니까요. 눈이 침침하여 초점이 맞았는지 잘 몰라 이리저리 렌즈를 돌려보기도 합니다. 상대는 늦겨울에 기침하여 이른 봄에 고개를 내밀고, 있는 듯 없는 듯 피어있는 꽃 한 송이가 언제나 감동이고 노다지입니다.
게다가 매크로렌즈로 바라보는 프레임 속 세상은 나의 호흡에 따라 춤을 추기도 하고 부는 바람에 따라 흔들리기도 합니다. ‘속눈썹 길이 밖에 안되는 꽃술’ 그리고 그것의 그림자를 들여다보면 눈앞에 우주가 펼쳐집니다. 셔터를 누르려 할 때마다 바람이 불기도 합니다. 호흡을 고르며 기다리다 보면 이번에는 내 숨결이 오르락내리락 리듬을 만들어 내며 나를 흔듭니다. 꽃이 흔들리는 것인지 내가 요동치는 것인지 구분이 점점 어려워집니다.
‘지층을 뚫고 올라온 여린 줄기 한 잎의 우주를 불러세운다’. 이보다 더 간결하게 야생화의 위대한 발현을 표현할 수 있을까요? 짧은 문장이지만 야생화의 일생을 모자람없이 말해주고 있습니다. 지구 밖의 우주도 끝이 없지만 마이크로 세계도 그 끝이 어디인지 알 수 없습니다. 앉은뱅이 소담스러운 꽃은 무릎을 꿇지 않는 자에게 제 모습을 훔치는 것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마치 허락이라도 구하듯이 경건하게 눈높이를 맞추고 가만히 대화를 나눕니다. 그러다 보면 객체와 내가 호흡이 비슷해지고 나에게 좋은 순간을 허락하게 됩니다.
이 시를 읽고 나니 카메라를 둘러메고 나가고 싶어집니다. 마음은 벌써 찬바람 쌩쌩 불고 눈보라 흩날리는 북사면의 비탈을 오르고 있습니다. 저는 이제 한 모퉁이에 피어있는 야생화가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