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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ugo Jan 01. 2020

하얀 쌀밥과 소고깃국

새해 첫날 먹는 한국인의 럭셔리 소울푸드

한 해의 마지막 날 친구집에서 카운트다운을 하느라 새벽 2시 가까이 되어서야 집에서 잠자리에 들었다.


새해 첫날 뒤늦게 일어나 성당을 다녀온 후 어떤 음식으로 해장을 할까 고민하다가 소고기국밥을 떠올렸다. 아내와 나이가 같아 거의 비슷한 어린 시절의 기억을 갖고 있는데, 소고깃국에 대한 기억도 마찬가지다. 집을 방문하는 손님들 손에는  신문지에 둘둘 말은 국거리용 소고기가 들려 있었고, 어머니는 손님상에 정성껏 끓인 소고깃국을 하얀 쌀밥과 함께 올렸다.


그런데 어린 시절부터 먹었던 그 경상도식 소고깃국을 파는 곳이 그리 많지 않다. 어머니표 소고깃국과 가장 싱크로율이 높은 곳은 헌인릉 입구에 있는 식당이다. 그곳에는 첫날부터 많은 가족 단위 모임이 있었고 쉴 새 없이 한우 등심이 탁자 위로 올려졌다. 고깃집에서 행복은 굽는 고기의 양과 비례할 듯한데, 아내와 나는 단출한 소고깃국을 먹어야 했다. 하지만 우리는 작은 소고기 조각과 얼큰한 국물을 앞에 두고 한없는 충만감과 행복감을 느꼈다.


하얀 쌀밥과 소고깃국은 한국에서는 매우 특별한 상징성을 갖고 있다. 70년대에 남북한 정치 지도자들이 국민들을 배불리 먹고살게 해 주겠다 말을 할 때 이 음식이 항상 언급되었다. 쌀이 귀하던 시절 하얀 쌀밥은 옥수수나 잡곡도 부족해 콩죽 등으로 보릿고개를 힘겹게 살아남아야 했던 국민들에게 희망이고 파라다이스였다-물론 부모님 세대가 귀에 딱지 앉을 때까지 읊어대시던 레퍼토리이지만. 게다가 소고깃국을 함께 먹을 수 있다는 것은 그야말로 천국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을까.


한 그릇에 만 원짜리 소고깃국을 배불리 먹고 나니 2019년부터 2020년, 무려 2년에 걸쳐 마신 술기운이 깨끗이 물러나고 든든한 뱃심과 한 해를 살아나갈 용기가 생기는 것 같았다. 누가 만원에 이런 효용을 나에게 가져다줄 수 있을까를 생각해보니 대안이 떠오르질 않는다.  


말레이시아에 이주해서 수백 년을 살아온 중국인 후예들이 중국말을 하지 못하더라도 먹는 음식은 대대로 그들의 어머니가 해주던 중국음식이라고 했다. 나의 조국 대한민국에서 세대 간에 문화나 식성이 급격하게 변화하고 있지만, 어머니가 해주시던 음식을 그리워하고 그것을 먹고 영혼의 위로를 받는 일들이 먼 훗날까지 대물림이 될 것이라 믿는다.


한국인의 소울 푸드로는 주로 된장찌개나 김치찌개 등이 언급된다. 나에게도 그렇다. 그런데 명절이나 좋은 일이 있을 때 생각나는 조금은 특별한 소울 드도 있다. 우리집의 경우에 쌀밥과 소고깃국은 그 중심에 서있는 따듯한 소울푸드라 하겠다.  


어제 밤 연말 파티는 화려했다. 이탈리아, 미국, 스페인, 독일의 와인과 트러플 뇨끼, 송아지고기 수비드 러드, 루꼴라 피자 등의 다국적 음식에 망개떡과 메밀전병까지. 다채로운 먹을거리로 덧없이 흘러가는 세월을 잊으려 했다.


하지만 결국 지금 나는 어머니를 그리워하며 하얀 쌀밥과 소고깃국을 앞에 두고 새로운 한 해를 살아갈 용기를 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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