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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ugo Feb 16. 2020

갈림길과 막다른 길

잠의 부족과 육체적인 시련을 이겨내고 드는 생각


함께 글 쓰는 문우님이 올리신 글 첫머리에서 생각에 잠기게 하는 화두를 발견했다. 갈림길과 막다른 길이라는 단어이다. 짬짜면과 콤비네이션 피자, 짜파구리를 탄생시킨 배경에는 우리가 갖고 있는 선택에 대한 불편함과 선택되지 않은 것에 대한 끝없는 미련이 자리 잡고 있으리라.  


갈림길에 대한 기억 

크게 리스크도 없고 그렇다고 마냥 쉽지만은 않은 회사 일에 대한 권태감이 밀려올 때마다 고등학교 일 학년 때 했던 적성검사 결과가 생각나곤 했다. 뜻하지 않게 '건축'이 일 순위로 나타났다. 내가 과연 꼼꼼하게 수치를 계산해 가며 건축 일을 하는 게 맞을지 모르지만, 30년째 문과 인생을 살고 있다 보니 가지 않은 길을 떠올릴 때마다 건축물을 그리고 있을 내 모습이 그려졌다. 그때 이과를 갔더라면 맡은 편 집에 사는 아저씨처럼 멋진 건축회사를 다니면서 인간에 도움이 되는 공간에 대해 고민하고 있을는지. 아니면 대학교 4학년 때 미국 유학을 가라는 아버지의 말씀을 귓등으로 듣고 연예에 몰두하지 않았다면 또 어땟을까? 서울에 집을 사지 않고 위성도시 어디쯤에 커다란 집을 샀더라면 나는 또 어떤 삶을 살고 있을지? 회사를 그만둔 후 공심 카페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나의 아둔한 글쓰기 실력이 제자리걸음조차 못하고 점점 졸필이 되어가고 있었겠지... 과거의 선택에 대한 끝없는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막다른 길은 갑자기 나타난다.  

작년 4월 경에 급작스레 회사를 그만두었다. 29년 평탄한 직장 생활의 끝이었다. 그동안 파도조차 한번 없었던 회사 생활에 쓰나미가 닥쳐왔다. 나를 비롯한 경영진이 싹 다 바뀌는 분위기였다.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출근하지 않는 첫 번째 날, 평일 늦은 아침에  헬스클럽에 가서 새로운 풍경을 보고 깜짝 놀랐다. 세상에 이렇게나 많은 내 나이 때의 사람들이 이 시간에 운동을 즐기고(주로 골프 연습) 사우나를 즐기고 있었는가?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은 대부분이 늦게 출근하는 사업하는 분들이었다. '아, 역시 월급쟁이와 사업가는 삶의 패턴이 다르군!'


연금을 받게 될 날이 너무 멀리 앞에 있어서 마냥 한량같이 지낼 수는 없었다. 집에 열흘쯤 있다 보니 집에서 와이프와 서로 불편함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나에게 따듯하게 대해주었지만 휴가 때 익사이팅한 여행을 할 때 말고는 24시간 열흘 이상 같이 있었던 일이 결혼 후 27년간 없었기 때문이다. 대체로 남편들은 직장생활에 지친 나머지 도시를 떠나 한적한 곳에서 식물들과 대화를 나누는 한적한 삶을 꿈꾼다고 한다. 하지만 아내들은 점차 익숙해진 도시를  떠나는 것을 절대 선택사양에 넣지 않는다고 한다. 


서울 인근의 한적한 곳에서 잠을 자고 일어나 집 뒤켠에 있는 상추밭으로 출근하고 싶었지만 내가 봐도 그거는 한 십 년쯤 후에 해야 할 일인 듯싶었다. 하는 수 없이 도서관에 가서 그동안 누리지 못한 많은 책들과 음악을 섭렵했다. 하지만 내가 갖고 있는 에너지의 스타일을 보면 하루 종일 문학세계에 빠져들기에는 무언가 잘 맞지 않았다. 사람들과 이야기도 하고 당장 처리해야 할 일거리에 대해 쉴 새 없는 토론도 하고 싶어 졌다. 


막다른 길인 것 같지만 몇 가지 갈림길이 나타난다. 

회사 몇 군데를 기웃거리기도 하고 박사과정을 공부할 학교를 골라보기도 했다. 하지만 점점 깨닫게 된 것은 더 이상 회사를 다니고 싶지는 않다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선뜻 공부를 시작하는 데에는 용기가 필요했다. 3년 후 나이가 50대 중반을 넘어서면 박사가 된 들 나를 받아줄 만한 곳이 있을까? 하는 생각을 수없이 했다. 두 가지 길 중 가지 않은 길에 대해 후회하는 날이 올지 모르지만 선택을 해야만 했다. 상추밭으로 출근하는 일은 환갑 이후로 미루기로 했다. 아니 말도 못 꺼냈다. 


갈림길을 가다 보면 또다시 막다른 길이 나타난다. 

9월부터  시작한 전일제 박사과정은 모처럼 프래쉬 해진 내 머리를 채우기에 참 좋은 주제들이 넘쳐났다. 스마트 시티를 구현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는 스케일이 있고 복잡한 문제였다. 하지만 내 인생 첫 스마트 시티 프로젝트는 서서히 그 복잡성과 참여자들의 관계의 모호성과 역할의 불분명을 드러내기 시작하면서 서서히 결과물에 대한 압박이 커져갔다.   


미진한 결과물에 대처하는 연구원에게 요구되는 자세는 헌신이었다. 헌신이 거듭되다 보니 당연히 수면부족과 규칙적인 운동부족으로 체력적 한계라는 늪에 빠지고 말았다. 아 계속할 수 있는 일인가? 체력이 버텨낼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허구한 날 12시 넘어 일이 끝났다. 아, 29년간 6시 땡 퇴근한 벌을 받고 있구나 싶었다. 


막다른 길을 발견하는 것은 머리가 아니라 심장이다. 

생각으로는 한번 마음먹은 일을 악바리 같은 근성을 발휘해서 끝가지 가보자고 하지만, 머리를 베개에 뉘이면 온갖 잡념들이 떠올랐고 그 잡념의 결말은 항상 중도 포기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암울했다. 미국 해병대가 아무 데서나 누우면 10분 만에 잠을 자는 비결이 있다던데 아무 소용없었다. 생각을 하지 않고 가만히 자신의 숨소리에 집중한다는 것이다. 수면제 없이 자려고 많은 해병대 놀이를 해보아도 심장이 쿵쾅거려 잠이 오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수면제를 일주일 내내 복용하고 잠들었다. 내가 아무리 부인해도 심장은 나를 그 어떤 곳으로 이끈다. 또는 어떤 곳을 벗어나게 하기도 한다. 


마침내 결전의 날, 프로젝트 결과물을 발표하는 일정이 끝난 후 꿀맛 같은 이틀을 보냈다. 오랜만에 10시간 이상을 자는 쾌거를 맛보았다. 수면제가 없어도 11시가 되면 졸리기 시작했고, 잠념없이 푹 자고 상쾌한 아침을 맞이 할 수 있게 되었다. 오늘 아침은 60일간의 부족한 수면 이후 이틀간의 충분한 수면이 있었던 날이다. 또 다른 프로젝트가 찾아오겠지만 한번 더 하면 잘할 것 같은 생각이 든다. 마치 골프여행을 가서 새벽 골프 18홀을 치고 나면 오후에 18홀을 완벽하게 칠 수 있을 것 같지만 전혀 그렇게 되지 않는다는 것과 같을 수 있다. 


잠을 자고 글을 쓰고 책을 읽는 생활의 루틴을 다시 찾을 수 있다면 한번 더 프로젝트에 매진하고 싶다. 나의 앞에는 막다른 길이 놓여있을까? 아니면 그 길의 보이지 않는 모퉁이에 실낱같은 또 다른 길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까? 불확실성이 주는 긴장감과 생동감을 동시에 느끼며 오늘을 살고 있다. 마치 소설가 안톤 체호프의 '입맞춤'에 나오는 포병장교 라보비치가 지주의 집을 갈 때 윗길로 갈지 아랫길로 갈지를 고민하는 것처럼 우리 앞에는 항상 두갈레 길이 우리의 선택을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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