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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ugo May 16. 2020

1972년 산 기계-McIntosh MR-78

나 만큼 오래된 튜너

1972년 산 와인도 아니고 골동품도 아닌 오래된 아날로그 튜너, 그것도 매킨토시를 모시고 살 생각을 처음부터 하지는 않았다. 매킨토시 튜너에 대한 안 좋은 선입견이 좀 있었기 때문이다. 친구 집에서 술 먹다가 들었을 때 느꼈던 화사하지 않고 어두운 느낌 말이다. 하지만 운명이란 게 이런 걸까. 잘 나오던 아큐페이즈 T101이 겨울을 지나면서 주파수 맞추는 게 점점 힘들만큼 상태가 나빠졌고, 급기야 아침마다 라디오를 켜고 오전을 보내는 와이프의 유일한 낙이 이제는 사라질 판이 되었다. 


돌이켜보니 이 놈도 1973년에서 1982년 사이에 생산된 오래되신 몸이었다. 연로하니 자주 건강검진을 해야 하는데 처음 들인 지 2년이 훌쩍 지났다. 아날로그 튜너는 2년쯤 지나면 간단한 건강체크를 하게 마련인지라 주파수가 서로 뒤섞이지 않게 세팅을 하러 오디오샵을 들렀다. 


다음 주에 찾으러 오겠다고 내부에 먼지나 좀 털어내고 주파수 조정을 해달라고 돌아서려는데, 많은 기계들 한가운데 떡 하니 자리 잡고 나를 향해 손짓하는 푸른 물체와 눈이 마주쳤다.  


'아, 매킨토시 한번 들어보자. 아날로그 튜너 최고봉 중 하나라는데' (이러면 안 되는 거였는데...)


명징한 건반 소리와 다이내믹한 입체감, 그리고 중후하고 편안한 저음에 마음을 빼앗겼다. 


'하루 종일 켜놓아도 귀가 아프지 않을 것 같은 아날로그 사운드야' 


'밤에 은은한 에메랄드빛 조명이 켜지면 나를 환상 속으로 몰고 갈 것이 분명해'


'추가로 내야 하는 돈은 다시 팔 때 고스란히 돌려받을 수 있으니 전셋집에 입주했다고 생각하면 돼'


그래서 토요일 밤 열 시가 지났는데 나는 93.1을 들으면서 나는 오랜만에 글을 올리고 있고, 와이프는 책을 읽고 있다. 라디오에서는 조였다 풀었다 하는 실내악이 흘러나오고, 우리 가족은 아날로그 향기 가득한 거실 한가운데 옹기종기 모여 앉아 있다. 


어릴 적 지나다니던 흔한 레코드점 문밖에 서있는 스피커에서 들리던 그런 아메리칸 저음의 디제이 목소리가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피아노는 산토끼처럼 경쾌하지만 깊은 울림이 있으며, 현은 어느 추운 겨울 영원한 줄 알았던 사랑이 파멸로 끝난 듯 애절하게 울어 댄다. 


얼마냐고요? 작년에 구입한 55인치 삼성 티브이보다 비싸다. 조금 비싼 전세 튜너와 함께 동거가 시작됐을 뿐인 거고... 위안이 되는 것은, TV는 10년 후 폐기물이 되지만 이 물건은 값이 더 올라갈 듯하다는 점이다. 전세 사는 거 맞는 거 같다. 내 인생 십 년만 책임져라. 우리 친하게 지내자. 매킨토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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