죤 스튜어트 밀이 저술한 ‘자유론’은 1859년에 출간되었으니 무려 160년 전에 쓰여진 것이다. 조선에 고종이 즉위하기 바로 3년전에 쓰인 글이 지금 대한민국이 처한 상황을 떠올리도록 살아 숨 쉬는 이유가 무엇일까? 배경음악으로 틀어 놓은 헨델의 메시아를 들으며 고전이 갖추어야할 기본 덕목에 대해 생각해본다. 헨델의 메시아가 초연되었던 1742년 더블린의 뮤직홀에서 청중들이 느꼈던 그 감동이 300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도 그 힘을 잃지 않고 있다. 고전(Classic)이란 그런 것이다. ‘시간과 공간을 넘어 영혼을 울리는 것’이 고전의 덕목이다. ‘자유론’도 그렇다.
출발이 늦었던 대한민국이 영국보다 휴대폰과 세탁기를 더 잘 만들 뿐만 아니라 영국의 젊은이들을 열광시키는 K-Pop의 나라가 되었다. 하지만 공익을 위한 권력의 효과적인 사용과 개인의 다양성을 존중하기 위한 공권력의 통제, 개인의 창의성과 관습 간의 적절한 균형 등의 측면에서 아직도 영국과는 160년 만큼의 격차가 그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아찔한 생각마저 든다.
영국의 소설가 조지 오웰은 1949년에 《1984년》이란 소설을 통해 우리가 모든 것을 감시 당하는 전체주의 국가의 모습을 그려냈다. 놀랍게도 ‘자유론’에서는 그보다 훨씬 이전에 다음과 같이 우리가 살고 있는 빅데이터 기반 디지털 사회(우리가 남긴 디지털 흔적에 의해 감시 당하는)가 갖고 있는 위험성에 대해 예견하고 있다.
“오늘날 사회에서는 지위가 가장 높은 사람에서부터 가장 낮은 사람까지 모두가 적대적인 시선과 가공할 만한 검열의 위협 속에 살고 있다. 그 결과, (중략)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자기 성격과 취향에 맞는 것은 무엇인지, 또 어떻게 해야 자신의 타고난 최고. 최선의 재능을 충분히 발휘하고 최대한 키울 수 있는지 고민하지 않게 되었다.”
페이스북의 현재(2019.7) 가입자 수는 전 세계 인구의 3분의 1인 24억 명이다. 평균적인 페이스북 사용자들은 매일 50여 분을 페이스북에 소모하고 있다. 유튜브의 국내 모바일 동영상 점유율은 43%이고 네이버의 국내 포털 점유율은 72%이다. 평균적인 모바일 이용자들은 특별한 이유 없이 습관적으로 하루에 85번이나 휴대폰 화면을 열어보며 살고 있다. 매우 많은 사람들이 SNS에 글을 올린 후 ‘좋아요’ 버튼이 몇 번이나 눌려지는지를 노심초사하며 체크하고 있고 이러한 ‘좋아요’에 대한 집착은 담배보다 더 중독성이 심한 것으로 밝혀져 있다. 마치 우리가 디지털 공룡 기업들이 만들어내는 접속자 증가용 꼼수의 노예가 되어 차별화되지 않은 뉴스들을 접하며 우리 인생에 별 도움이 안 되는 대중적인 방식으로 길들여지고 있다.
“대신 자신의 위치에 어울리는 것이 무엇인지, 자기와 비슷한 신분의 사람이 주로 무엇을 하는지 궁금해한다. (중략) 관습적인 것을 빼고 나면 그들에게는 따로 자신의 기질이라는 것이 아예 없다. 정신 자체가 굴레에 묶여 있는 것이다. 재미 삼아 하는 일도 다른 사람이 무엇을 하는지 먼저 살피고 따라 하고, 군중 속에 묻혀 들어가기를 좋아한다. 선택도 그저 사람들이 흔히 하는 것 가운데서 고르는데 국한된다. (중략) 그리하여 그들이 지닌 인간 능력들은 시들고 죽어버린다.”
회사에서 고객들과 관계 유지를 하기 위해 탁구를 치거나 미술관을 관람하거나 재즈카페를 갔다는 뉴스를 접해 본 일이 거의 없다. 그저 관습적으로 골프를 치거나 좋은 식당이나 술집을 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사회구성원이 자신의 기질적인 특성이 이끄는 대로 관습과 억압에서 벗어나 다양한 취미를 선택하는 것이 더 장려되어야 한다.
“전통과 관습은…(중략) 적절한 수준에서 참고할 필요가 있다. (중략) 그저 관습이 시키는 대로 따라 하기만 하는 사람은 아무런 선택도 하지 않은 것이나 다름없다. 무엇이 최선인지 구분하는, 또는 가장 좋은 것에 대해 욕망을 느끼는 훈련을 하지 못하는 셈이다. 근육과 마찬가지로 사람의 정신이나 도덕적 힘도 자꾸 써야 커진다.”
‘연탄길’을 쓴 이철환 작가는 불완전한 인간이 갖고 있는 이기심을 깔보지 말라고 말했다.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범위 내에서 자신을 위한 행동을 하는 것을 깔보거나 무시하거나 비난하지 않고 너그럽게 보아주라는 거다. 불법행위도 아닌 조그만 실수나 이기심마저 용납하지 않는 사회는 공산주의 인민재판과 무엇이 다를까? 지난 십 수 년간 논란의 중심에 섰던 가수 유승준이 한국에 입국을 시도하다가 메르스 사태 때에는 잠잠했다는 이유로 비난하는 사람도 있다. 당신이라면 어떠했을까? ‘나 라도 그런 상황에서는 그럴 수 있었다’. 하고 이해해줄 수는 없을 걸까?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한, 각자의 개성을 다양하게 꽃피울 수 있어야 한다. 누구든지 시도해보고 싶다면, 자기가 원하는 삶의 양식이 얼마나 가치 있는 것인지 실천적으로 증명해볼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전 세계 모든 나라들이 경쟁우위를 선점하려고 하는 4차 산업혁명기술 무한경쟁 시대를 살고 있다. 사회구성원들이나 기업들이 저마다의 개성을 살려서 꽃을 피울 수 있도록 하는 것, 그래서 기존의 관습과 전통을 확 바꿔버릴 수 있도록 허용하고 윽박지르지 말고 기다려주는 것이 절실하다. 새로운 시장 파괴자를 바라보는 사회(특히 정부)의 시선이 미국과 같이 ‘Do no harm’, 즉 사회에 해를 끼치지 않는다면 최소한 그냥 내버려 두는 자세가 정말 필요하다. 다양성이 꽃 피게 하는 힘이 우리의 미래를 결정지을 핵심요소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