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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ugo Jan 10. 2021

20살 증후군을 겪으며


오해가 없으시길 바란다. 20살이 내 나이는 아니다. 내 딸도 그보다는 더 먹었으니. 내가 사랑하는 기계들이 20살을 맞이하며 하나씩 파업을 하기 시작한 이야기이다.


지난 12월에 시름시름하던 20살 먹은 스피커를 살려놓았더니, 이번에는 같은 나이의 진공관 엠프가 말썽을 부리기 시작했다. 전원을 켜는 순간 작은 입력관 하나에서 마지막 불꽃을 내면서 전원이 먹통이 된 것이다. 아~ 20년 된 진공관 엠프가 드디어 파업에 돌입했구나~ 관을 바꾼지는 13년쯤 된 듯싶었다.


따듯한 음색과 여러 음역대에 균형 있는 소리를 내어주던, 잦은 오디오 바꿈질에 끝을 보게 만들어주었던 나의 최애 아이템이 더 이상 소리를 내지 않는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일단 용산에 있는 진공관 판매처에서 새로운 관을 구입해야 했다. 내 기억에 진공관 하나를 평균적으로 8천 시간 정도 사용이 가능하다고 했으니 내가 지난 십여 년 동안 그 정도 들었나 보다 했다. 수십 년 전, 트랜지스터가 세상에 없던 시절에 유럽에서 만들어진 관들은 너무 비싸기 때문에 이번에는 러시아에서 만든 복각 제품을 사용하기로 했다. 하지만 8개의 관을 구입하니 앰프 가격의 1/5 정도가 훅 하고 사라졌다.


반나절을 걸려 새로운 관 8개를 사 와서 교체를 했는데 여전히 전원 표시 램프가 미동도 없었다. 결국 엠프 내부에 무슨 문제가 생긴 것이다. 엠프를 들고 튜너 수리 때문에 알게 된 맥가이버 아저씨를 찾아 가보니 출력관(EL34)이 나가면서 내부 회로를 보호하기 위해 퓨즈가 나가버렸고 알고 보니 조그만 저항 하나도 먹통이 되어버렸다.


몇백 원짜리 저항과 퓨즈를 교체하는 일이지만 원인을 찾는 데에는 한 시간이 족히 걸렸다. 수리비용은 부품비용보다 수백 배 높은 인건비와 전문가 비용 기준으로 청구되어 꼼짝 못 하고 추가 지출을 했다. 수리를 받을 때는 항상 애가 타는 심정이라 돈을 쓰면서도 을이 된 기분이다. 전에 다니던 회사도 서비스 파트 직원들은 '갑'같이 고객을 대하고 영업하는 직원은 고객 앞에서 영원한 '을'이라고 푸념을 하던 일이 생각났다.


그러고 나서 음악을 들으니 다시 태어난 엠프와 스피커가 뿜어내는 소리에서 신선하고 활기찬 신세계가 펼쳐진다. 스마트폰에 깔린 만보기에 하루 78걸음만 기록하고 수없이 많은 다양한 곡들을 들으며 하루를 보냈다.


오늘은 결혼 28주년 기념일인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관을 교체하듯이 우리의 결혼 생활은 새로운 에너지를 만들어 내고 있는가?  내일이면 다시 맞이하게 될 30년 차 직장 생활은 초심을 갖고 다닐 수 있을까? 나의 몸과 마음을 새롭게 할 수 있는 효과적인 수단인 글쓰기를 통한 자아성찰에 대한 불을 다시 지펴보아야 하지 않을까?


이런 생각을 하면서 잠을 청해 본다. '저 새로운 진공관은 내 몸에 꽂은 것이다. 멋진 음악을 연주하는 한 해를 만들어 봐야지. 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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