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at. 절교 고민
얼마 전, 3n년 만에 처음으로 일본에 다녀왔습니다. 사실 부모님의 다른 자식놈이 몇 년간 유학 가있기도 했고, 가족여행도 (저 빼고) 가곤 해서 기회가 몇 번 있긴 했지만, 썩 내키지 않았거든요.
가격/문화적인 메리트가 별로 없다고 생각했고, 가끔 들리는 혐한 썰들이나 뭐 여러모로요.
그러다, 올해 말에 결혼하는 친구가 자기 소원이니 결혼 전에, 한 번만 같이 가달라고 하는 통에... 통역/맛집 소개 자기가 다 한다고...! 해서 얼마 전 일본에 다녀왔습니다. 마침 슈퍼 엔저이기도 했고요.
에히메현, 마츠야마라는 소도시였는데, 찾아보니 항공권도 그리 비싸지 않고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과 나츠메 소세키 <도련님>의 배경이 된 도시라 선선히 수락했죠. 그러지말았어야했는데
결론부터 말하자면 2박 3일 일정이었는데, 딱 첫날! 그것도 한 22시까지만 좋았습니다.
오후에 도착해 리쿼샵(liquor shop)부터 들러 술 조금 사고, (850원 대에 미리 환전해 둔 터라, 술들이 반값도 안 되더라고요!!!) 체크인 후 인증샷을 찍을 때까진 좋았죠...
아니, 이후에 간 해산물 오마카세집까지도 좋았습니다.
사케와 생맥주를 비롯, 전부 다 해서 인당 한화로 7만 원 정도였거든요. 해산물 맛이야 말해 뭐 하겠습니까...
문제는 이제 술집 n차를 거치면서 발생합니다.
친구를 위해 잠깐 변론을 미리 해보자면, 이 친구는 일본을 수십 번씩 다녀왔을 정도로 좋아하고 사케도 무척 좋아합니다. 코로나로 몇 년간 묶여 오랜만에 간 일본이었고, 엔저 덕에 가뜩이나 현지에서 싼 사케들이 한국 가격의 반 그 이하로 무척 저렴했습니다.
그리고 전 사케를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다시 돌아와, 2차 3차를 거치며 이 친구는 사케를 도쿠리로, 가끔 병째로 마시며 차근차근 취해가기 시작했습니다. 전 처음 맛본 일본 생맥주에 미쳐서 맥주만 계속 마셨지요. 그리고 문제의 4차.
새벽 시간이라 가게들은 거의 다 문을 닫았고 허름한 우동집이 하나 열려있길래 간단히 해장하고 돌아가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새벽까지 술 먹고 돌아다니는 한국인이 신기했는지(소도시라 돌아다니면서 한국인을 거의 보지 못했습니다) 주인장이 친구에게 이것저것 말을 붙이더라고요. 친구는 신나서 어쩌고 저쩌고 떠들고, 전 그러려니 하고 맥주만 계속 추가해 마셨지요...
다행히 전 맥주로는 취하지 않아서 매우 멀쩡한 상태였습니다. 저까지 취해있었다면 아마 감옥에 갔을지도...?
그러다 마츠야마 특산품이라며 주인이 사케를 추천해 줬나 보더라고요. 뭔가 아주 큰 사케가 나왔습니다. 둘이(저랑 친구 말고 친구랑 주인장이...) 신나서 한 병을 더 추가하고, 추가하고... (이땐 주인분이 아예 저희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앉아있었습니다. 손님이 저희뿐이었거든요) 친구는... 하...
마지막 세 병째 사케는 다 못 비우고 일어났는데, 여기서 6만 엔 정도 나왔습니다.(한화 약 60만 원... 당연히 친구 카드로 결제했습니다) 호텔까진 골목길 두 개만 지나면 됐는데... 골목길 하나를 지나자 친구가 토를... 하더니만 차도 한가운데 쓰러져 버리는 게 아니겠습니까...
어떻게든 깨워서 데려가려고 용써봤는데... 완전 만취해 뻗은 성인은, 한 명으론 어림도 없더라고요. 택시들은 뒤에 줄줄이 서서 빵빵거리고 친구는 미동조차 없고...
곧 경찰차가 도착했습니다.
처음엔 두 명의 경찰관만 왔습니다. 한 명은 제 친구를 인도로 끌어내려고 애쓰고 (실패하셨지만) 한 명은 저를 심문하셨죠. 여권도 내놓으라고 하고요. 다행히 제 여권은 호텔에 있어 친구 여권을 보여줬답니다... :)
그러던 와중 세 명의 경찰관이 추가로 도착해 친구의 사지를 한 번에 들려는데... 누운 채로 계속 토를 하더라고요. 결국 기도가 막혔는지, 숨도 쉬지 못해서 앰뷸런스까지 도착했습니다.
경찰차 두 대에 경찰관만 다섯 명... 앰뷸런스까지 도착하니 길 가던 행인들도 전부 서서 구경하고... 결국 친구는 들것에 실려 앰뷸런스에 타고, 저도 당연히 보호자로 같이 탔답니다...^^
억겁과도 같던 시간이 지나고, 병원에 도착하자마자 친구는 응급실로 보이는 곳으로 들어가고 전 복도에 버려졌습니다. 한 시간 정도는 좀 기다려 봤는데, 말도 안 통하고 나올 생각도 없어 보이고 해서 결국 잠들었죠. 아침 여섯 시가 되자 그제야 비척비척 기어 나오더라고요.
간호사로 보이는 분이 저한테 다가와 뭐라 뭐라 하는데 제가 할 줄 아는 일본어라곤 ‘나마비루 구다사이’뿐이라... 그 와중에 친구는 병원 복도에다가 또 토를... 후...
수납하라는 이야기였는지, 토를 대충 치우고... (죄송합니다 일본분들...) 결제하는데 7만 엔(한화 약 70만 원)이 넘게 나왔습니다.
병원에서 불러준 택시를 타고 호텔로 왔는데 이때도 3~4만 원 정도가 나왔고요.
새벽 몇 시간 새 거의 150만 원을 태운 거죠...
아침에 호텔로 돌아와, 다시 수십 번 토하더니 탈진해 죽은 듯이 자던 친구.
결국 남은 일정들은 모두 캔슬하고, (억지로 한 번 나가봤는데, 몇 걸음 걸을 때마다 계속 토하더라고요...) 말도 못 하는 전 파파고에 의지해 편의점이랑 백화점? 같은 곳에서 즉석식품들과 맥주를 잔뜩 사다가 하루를 보냈답니다.
소도시니 혹시 어글리코리안의 이야기가 뉴스로 나오지나 않을까 걱정돼 계속 뉴스 채널에 시선을 고정하고요... 진짜... 하......
일본 여행 제대로 시켜준다던 친구 덕에, 첫 일본의 기억은 구토와 경찰차, 구급차로 채워지게 되었지요.
한국에서도 한 번도 못 해본 경험을 다 해보고, 완전 럭키비키지 뭐예요. ^^
돌아와서 한동안 친구랑 연락을 안 했습니다. 지금은 화해했습니다.
1) 얼마 뒤 제 생일이었는데, 미안하다며 비싼 술을 집으로 보내왔습니다. 여기서 살짝 풀렸습니다.
2) 부모님께 첫 일본 썰을 풀어드렸는데, 그 친구가 너 스무 살부터 본 술주정을 생각해 봐라. 일시불로 한 번에 갚았다 생각하고 화해하라고 하시더라고요. 듣고 보니 너무 맞는 말이라 수긍했습니다.
뽀로로놈들은 이 썰을 듣더니만 신나서 웃어 젖히더니, 일본 여행을 좋은 기억으로 다시 덮어주겠다며 항공권을 끊게 했습니다. 현재 다녀온 상태입니다.
과연 좋은 기억으로 덮였을지는... 곧 써보겠습니다. 그럼 20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