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하기 위해 산다?’ 당연하다는 듯이 이 명제가 내 머릿속에 관념으로 깊숙이 자리 잡았다. 그래서 살면서 자주 “너는 행복하니?” 하고 스스로 묻곤 했다. 애당초 행복 의미도 모르면서 뚱딴지같은 질문 계속하니 나는 참 바보다. 요즈음 이 명제가 옳을까 의문이 자주 든다. 나의 최애 드라마 〈나의 아저씨〉 마지막 장면에서 “지안, 편안함에 이르렀는가”라고 묻는다. 그래, 편안함에 이르는 게 행복이 아닐까 생각을 했다. 그러다 이내 고개 저으며 생각을 매듭짓지 못한다.
그러던 와중 서은국 교수가 쓴 〈행복의 기원〉 책을 읽었다. 그는 행복 뜻을 기존 관념과 달리 생존본능에 바탕을 뒀다. 그는 행복은 거창한 관념이 아니라 구체적인 경험이라고 한다. 인간은 행복하기 위해서 사는 게 아니라 ‘생존과 번식’을 위해 산다. 인간 본질은 동물이다. 진화 과정에 ‘음식 먹기와 짝짓기’를 한다. 인간은 왜 목숨을 걸고 치열하게 음식을 먹고 짝짓기를 할까? 그것은 쾌락 때문이다. 쾌감은 인간 뇌가 고안한 본질 보상이다. 음식 먹기와 짝짓기, 여기에 하나 더 보태면, 인간은 뼛속까지 사회적이다. 혼자서는 생존할 수 없기에 무리를 지어 산다. 이 사회성 덕분에 인간은 놀라운 생존력을 갖게 됐다.
인간은 어떤 일이든 익숙해지면 지겨워한다. 그리고 생존을 위해 컴퓨터 포맷처럼 쾌락을 금방 초기화시킨다. 아침에 먹은 음식을 까먹고 오후에 또 다른 먹거리를 찾아 나선다. 인간은 잃어버린 쾌감을 찾아 매일 길을 나선다. 이러한 과정에서 쾌(pleasure) 감정이 분출된다. 기쁨, 즐거움, 환희, 자아 성취 등 긍정적인 정서가 배어 나온다. 그러면 행복 전구가 깜박거린다. 긍정 감정이 자주 솟구치면 그 횟수만큼 행복을 느낀다. 행복은 기쁨 빈도이다. 로또와 같은 한방이 아니다. 쾌의 본질적 기능은 생존에 유익한 활동이나 생각이다. 사람들은 행복 과녁을 제대로 못 맞힌다. 그것은 쾌락 중요성을 과소평가했기 때문이다.
행복은 본질적으로 감정이다. 감정은 제각각 다르다. 따라서 행복은 지극히 사적 체험이다. 붉은 저녁노을을 보면, 어떤 이는 자연의 웅장함에 경이로움 기쁨을 느끼며, 어떤 이는 슬픔을 느낀다. 느낌(feeling) 강도와 세기, 모양과 색채는 제각각이다. 이렇듯 개인감정에 어떤 표준 잣대를 들이대어 옳고 그름을 재단하면 안 된다. 내가 아메리카노 커피를 좋아하는지, 라테 커피를 좋아하는지 남들에게 장황하게 설명할 필요가 없다.
물리학자 김상욱 교수는 행복을 과학적으로 해석했다. 행복은 지속 가능한 감정이 아니다. 왜냐하면 결국 행복이라는 게 과학적으로는 호르몬 작용일 뿐이다. 뇌에서 화학물질이 나오면 행복함을 느낀다. 그러면 계속에서 도파민이 나오면 하이퍼 상태가 된다. 이러면 사람이 미친다. 그러니까 사실은 행복을 추구한다는 게 엄청 공허한 일이다. 아무리 행복을 추구한들 결국은 우리 뇌는 균형 상태로 되돌아온다. 행복을 추구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예나 지금이나 인간은 행복에 대해 필요 이상으로 거창하고 추상적 논의를 했다. 행복은 마치 평생에 걸쳐 꼭 도달해야 하는 종국 가치라고 착각한다. 이는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 윤리론에서 지어낸 ‘행복 신비주의’ 영향이 크다. 지금도 행복이란 키워드를 검색하면 제일 앞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니체는 철학은 망치로 한다고 했다. 이것은 과거에 얽매인 생각의 관념을 깨트리라는 말이다. 케케묵고 진부한 관념에서 탈출해야 새로움이 움튼다. 행복은 행복 관념에 집착하지 않고 버리는 것에서 출발한다.
내가 도화지에 채색한 행복 모습이다. 여학생들이 쉬는 시간에, 하굣길에서, 공원에서 수다를 떤다. 그 소녀들은 대화하면서 연신 깔깔거리며 웃는다. 작은 손짓과 몸짓, 제스처에도 재미있다고 마냥 깔깔거린다. 그 웃음소리는 영롱한 이슬처럼 맑고 청아하다. 소녀들은 어떤 가식과 체면, 위선과 비굴 없이 그저 신나고 좋아서 웃는다. 예쁘고 아름답게 빛난다. 그렇다. 행복은 관념이 아니라 현상이다. 친구와 연인과 가족과 이야기를 하면서 맛난 음식을 먹는 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