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만 낳는다고? 이기적인 거 아냐?

by 참깨

“둘째를 안 낳아? 이기적인 거 아냐?”


그런 말을 종종 듣는다. 외동을 생각하고 있다 하면 사람들은 ‘이기적’이라는 단어를 너무 쉽게 올린다. 그럴 때마다 나는 당황한다. 이리저리 핑계만 댄다. 아이 출산 후 아직 여기저기 아픈 곳이 많네, 복직이 얼마 남지 않았네, 등등. 여전히 나는 ‘무례한 사람에게 웃으며 대처하는 법’을 잘 모른다.


내 속에서도 뜨끔하기 때문이다. 출생률이 이렇게나 낮은데, 인구 절벽이 곧 온다는데 아이를 하나만 낳는다니 정말 이기적이군, 하는 관념이 나도 모르게 내면화되어있다 이성이 머뭇거리는 사이 감각이 그 말에 동조해 버린다. 나는 왜 내 안위가 제일 중요할까, 대의에 봉사하지 못하는 소시민적인 삶을 살아갈까. 다행히 이런 쓸데없는 반성의 시간은 잠깐이다. 민첩하게 작동하지 못할 뿐이지 나에게도 어느 정도 훈련받은 이성이 있다.


사람들이 ‘이기적’이라는 수사를 써가며 나를 계몽시키려 함은 다름 아닌 외동 고수가 국가에 대한 책임을 다하지 않는 행동이라는 판단 때문인 경우가 가장 많다. “나라에 둘 정도는 낳아 줘야지”와 같은 말이 생각보다 빈번하다.


아이를 낳는 것 자체도 ‘이기적’인 것이잖아요


여기에 나는 다음과 같은 논리로 문제제기를 할 수 있(었)다. 부부는 아직 수정되지도 않은 상태의, 상상 속의 가능성으로만 존재하는 아이를 위해 임신하지 않는다. 부부의 바람이 아이를 만든다. 결국 내가 원해서 하는 것이 임신이고 출산이고 육아이다. 그런데 마치 그 바람이 없었던 양 말하는 것은 뭔가 수상하다. 한 생명의 창조는 분명 숭고한 과정이지만 그렇다고 그 과정에 나를 위하는 마음이 없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것은 임신에 대한 지나친 미화이다. 혹은 모성의 신격화이거나. 결국 아이를 하나 더 낳기로 결정하는 것도 결국은 (그들의 수사를 그대로 따른다면) ‘이기적인’ 행동이다.


둘째를 낳기로 결정하는 과정을 지켜보면 그것이 얼마나 ‘이타적임’과는 거리가 먼지 확인하게 된다. 첫째와는 다른 성별의 아이를 하나 더 갖고 싶어 둘째를 갖는다는 말을 종종 듣는다. 아들이 있으니 딸을, 딸이 있으니 아들을 낳고 싶어 한다. 합당한 욕구다. 두 성별을 모두 키워보고 싶은 마음은 누구에게나 있음직하다. 간혹 같은 이유로 셋째를 낳는 경우도 있다. 우리 집이 그런 경우였다. 외동으로 나를 키우려던 나의 부모는 뒤늦게 아이를 하나 더 가졌다. 너무 늦기 전에 나에게 동생을 만들어주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나의 부모는 회고하곤 한다. 그 의도를 나는 의심하지 않는다. 그런데 낳고 보니 딸이었다. 은연중에 아들을 낳고 싶은 바람이 나의 부모에게도 있었나 보다. 나의 부모는 곧바로 나에게 동생 하나를 더 만들어주었다. 그렇게 나는 나와 터울이 큰 연년생의 동생 둘을 갖게 되었다. 특별한 이야기는 아니다. 딸 둘에 아들 하나가 있는 세 자녀 가정에서 자주 발견되는 시나리오다. 이러한 의사결정 과정이 나라를 위함인가? 가족계획은 그다지 이타적이지도 않고, 거국적이지도 않다. 오히려 소소하고 인간적이다.


‘애국’은 이 과정에 따라오는 긍정적 부산물일 뿐이다. 과정은 매우 사적이었지만 결과적으로 그들은 애국을 했다. 국가는 커플이라는 작은 공동체의 욕망으로 인해 분명한 이익을 보았다. 아이가 많은 가정의 부모는 더 많은 돌봄 노동을 해야 하고, 더 많은 자원을 써야 한다. 국가는 아이가 많은 가정에게 더 많은 경제적 혜택과 직접적 돌봄 노동을 제공해야 한다.


여전히 공적 돌봄을 대신하고 있는 자녀들


간혹 첫째를 위해 둘째를 낳는다는 사람들도 본다. 늙은 부모를 혼자서 감당하기 힘들 테니 둘째를 ‘낳아준다’는 것이다. 국가의 책임 비중을 늘려야 할 노후 복지를 자녀를 하나 더 낳음으로써 사적으로 해결할 수밖에 없는 현실을 그대로 반영한 인식이다. 아래는 김희경의 책 <이상한 정상 가족>의 한 구절이다.


미셸 푸코는 “가족 자체가 공과 사의 혼혈아이며 공과 사의 경계는 유동적으로 재구성된다”라고 말했다. 앞서 살펴본 스웨덴이 ‘공’을 늘려 ‘사’를 보존한 경우라 할 것이다. 우리는? ‘공’이 모자라 ‘사’가 너무 많은 일을 감당하느라 그 안의 모두가 불행해진 상태라고나 할까.
가족의 ‘공, 사’ 비율에서 ‘공’을 늘리기 위해 공공이 개입하는 것은 가족의 해체가 아니라 가족의 짐을 사회가 덜어주자는 것이다. 가족을 없애자는 게 아니라 모두가 더 행복해지기 위해 가족에게 부과된 의미와 기능을 축소하자는 것이다. 가족 내의 민주적 관계와 자율성 존중도 그럴 때에 가능할 것이다. (237쪽)

자녀에게 내 노후를 의존할 수 있다는 생각은 많이 옅어졌지만, 어쩔 수 없이 자녀가 부담해야 할 부분이 많다는 ‘감각’은 그대로인 것 같다. 노인을 부양해야 하는 부담이 젊은 세대의 자녀들에게 전가되는 점은 과거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이니 이성(내 자녀에게 짐이 되지 말아야지)과 감각(자녀가 많을수록 짐이 분산되겠지)에 괴리가 생기는 것이다.


아이를 하나만 낳거나, 혹은 무자녀를 택하는 사람들은 오히려 이 ‘감각’에서 자유로운 사람들이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지금까지 키워준 노고를 나중에 돌려받겠다는, 다분히 레트로적인 그 감각 말이다.


그런 사람들에게 이기적이라는 말은 아주 무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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