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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주차 | 16일, 4월, 매해

by 참깨


내가 서러워서, 정말

나, 세상에 나온지 256일


내가 이유식 대신 밥을 먹기 시작한지 이제 20일 정도가 되어간다. 다른 아기들보다 조금 빨리 밥을 시작하게 된 데에는 분명한 한 가지 이유가 있다. 내가 이유식을 잘 안 먹어서. 나는 이유식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 이유식 먹을 때가 되면 떼를 쓰고, 괜히 딴짓을 하고, 입에 들어온 이유식을 손가락으로 꺼내고, 그걸 얼굴에 바르고, 그러다가 배가 고파지면 마구 울어댔다. 그러면 엄마는 하는 수 없이 분유를 줬는데 그렇다면 나의 이유식 거부 작전은 성공이었다.


그러다가 어느 날 식당에서 우연히 밥이 아주 맛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엄마, 아빠만 맛있게 먹고 있길래 소리를 고래고래 질렀더니 당황한 엄마가 밥알을 몇개 입에 넣어줬다. 그 때 알게되었다. 내가 왜 이유식을 싫어했는지를. 이유식의 질척한 식감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이다. 쌀밥은 달랐다. 토돌토돌한 밥알을 입 안에 넣고 굴리다가 몇 번 씹어 주면 진득한 단맛이 배어난다. 나는 그 자리에서 어른 숟가락에 고봉으로 얹은 밥을 다 먹었고, 그 뒤로 지금까지 매일 두 번씩 밥과 국과 반찬을 먹고 있다.


그렇다. 이제 갓 8개월을 살았지만, 나는 밥을 먹는다. 즉 어른과 똑같은 음식을 먹는 사람이란 말이다. 그런데 나의 부모는 디저트 영역에서는 나를 여전히 어린 아이 취급한다. 나랑 나란히 앉아 같이 밥을 먹어놓고(나는 미역국, 엄마 아빠는 카레) 왜 아이스크림은 나만 쏙 빼고 먹는 것인가. 아이스크림 하나가 냉동실에 남아있다는 것을 내가 뻔히 아는데 두 개만 꺼내서는 보란듯이 막대를 돌려가며 호로록 호로록 녹여먹는 모습이란. 분하고 속상해서 울지 않을 수가 없었다. 요새 자주 울지 않으려고 하는데 가끔 이런 차별에 울컥울컥 한다. 다른 것도 아니고 먹는 걸로 이러다니.


내가 서러워서, 정말.


아빠와 문화센터

나, 세상에 나온지 257일


오늘은 내가 수강하는 문화센터의 두 번째 수업 날이자, 아빠와 함께 한 첫 번째 수업 날이자, 마지막 수업의 날이었다. 사정상 문화센터에는 이제 다니지 못하게 되었다. 엄마가 장난감도서관에 장난감을 대여하러 간 사이에 나와 아빠는 문화센터 강좌에 함께 들어갔다. 집에서 엄마 없이 아빠와 단 둘이 있었던 적은 아주 많지만, 아빠와 바깥에서 둘만 남겨진 것은 처음이었다.


나는 아빠와 있을 수 있어 아주 좋았지만 아빠는 자주 난감해했다. 나는 피곤하거나 긴장하면 쪽쪽이가 필요한데 아빠는 자꾸만 나에게 빨대컵을 줬다. 내 뒤에 앉아 있어 주면 마음이 놓이겠는데 자꾸만 먼 곳에 가서 사진을 찍었다. 아빠는 엄마의 사진과 영상 주문을 정직하고 충실하게 따르고 있었다.


오늘의 수업 주제는 결혼식. 반짝이 예복을 입고 결혼식 모습을 재현해보는 수업이었다. 내 파트너는 지난번 수업에 내 옆에 앉았던 여학생이었다. 친해지고 싶어 여러 번 관심 표현을 했지만 걷지 못하는 나에게는 눈길을 주지 않던 그 학생. 나는 그 여학생이 싫었던 것은 아니지만 어른들이 주도하는 이런 식의 정략 결혼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나중에 커서 결혼을 하게 될지, 결혼식을 올리게 될지 알 수는 없다. 다만 좋은 파트너를 만나고 싶다는 마음은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내가 괜찮은 녀석이 되어야겠지.


벚꽃, 안녕

나, 세상에 나온지 258일


커다란 호수 주변에 심은지 오래된 벚꽃나무가 분홍 구름처럼 끝도 없이 피어 있었다. 사람들이 파스텔 색깔의 솜사탕을 들고 다녔는데 금방이라도 가볍게 떠올라 벚꽃송이에 폭신하게 안길 것만 같았다. 오늘은 태어나서 가장 많은 꽃송이와 가장 많은 사람들을 보았다.


오늘의 꽃구경에는 할머니, 할아버지가 동행하셨다. 함께 꽃놀이를 가자는 전화에 나의 조부모님은 한달음에 달려오셨다. 우리는 함께 맛있는 연포탕을 먹고 벚꽃길을 걸었다. 할머니, 할아버지는 나를 보아 좋았고 엄마, 아빠는 꽃과 사람들을 보아 좋았고 나는 이 모든 것이 좋았다.



(진짜) 결혼식

나, 세상에 나온지 259일


문화센터에서 하는 결혼식 흉내 말고, 오늘은 진짜 결혼식에 다녀왔다. 엄마의 사촌동생이 결혼을 했다. 나에게는 오촌 이모뻘. 신랑과 신부는 2600일이 넘게 사랑하며 만났다고 한다. 나는 이제 세상에 나온지 260일인데. 내가 아주 작고 어리게 느껴졌다.


뷔페는 생전 처음이었다. 할머니가 운전하는 유모차를 타고 음식 구경을 했다. 세상에 이렇게 다양한 음식이 있다니. 자다가 쪽쪽이를 뱉고 벌떡 일어날 노릇이다. 그 동안 많은 음식을 먹어보았다고 생각했는데, 나의 세계는 260일의 작은 세계일 뿐이었구나. 엄마, 아빠와 할머니가 번갈아가며 내가 먹을 음식을 날라다 주었다. 전복죽, 짭짤해서 엄마가 한 숟가락만 주고 말았다. 크라비, 하나를 맛있게 먹었는데 가공식품이라며 할머니가 먹지 못하게 했다. 단호박 샐러드, 한 스쿱 클리어. 바지락국과 밥, 한 스푼 클리어. 도가니탕 국물, 호로로로록. 포도, 자주 먹어본 거라 익숙해서 4알만.


공유 경제

나, 세상에 나온지 260일


나는 지금 할머니가 사주신 내복에 육촌형이 입던 조끼를 입고 있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나사를 풀어 놓은 걸음마 보조기와 아빠가 닌텐도 하느라 나를 앉혀두곤 하는 쏘서도 육촌형이 쓰던 것. 이제는 장난감 바구니로 쓰는 범보 의자도, 내가 지금까지 매일 잠들고 깨어나는 아기 침대도, 내가 앉기만 하면 곯아떨어지는 카시트도, 유모차도 이미 모두 누군가의 손때가 묻은 것이다.


나의 부모는 쇼핑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아빠는 원래 물건을 소유하는 데에 거의 관심이 없는 사람이다. (요새 매일 가지고 노는 닌텐도 게임기도 회사 동료에게 빌린 것.) 엄마는 결혼한 뒤로 집에 물건들이 많아지는 것을 부담스러워하고 있다. 결국 둘이 점점 닮아가고 있다. 내가 태어났을 때 3벌의 여름용 우주복을 산 것이 내 부모가 나를 위해 한 의류 쇼핑의 거의 전부였다니 말을 다 했다. 선물이 많이 들어왔고, 가까이 사는 친척에게 이것저것 물려받았다. 엄마가 우주복 세 벌을 괜히 샀다며 후회할 정도로.


이미 내가 쓸 시기가 지났거나 아직 쓸 때가 오지 않은 물건들이 방 구석에 쌓여 있었다. 부지런과는 거리가 먼 나의 부모는 방 하나를 아예 창고처럼 사용하고 있었다. 엄마와 아빠가 그 방을 오늘 정리했다. 정리하고 보니 책이 다섯 상자라고 한다. 집 바로 앞이 도서관인데다가 물려받은 책이 다섯 상자나 되니 앞으로 몇 년간 책을 살 일은 없을 것 같다. 크고 작은 장난감 자동차들이 한 상자라고 한다. 새 장난감 자동차는 내 생에 전혀 없을 가능성이 크다.


언젠가 장난감 말고, 내 소유의 진짜 새 자동차를 가지게 될 날이 올까? 아마 아닐 것 같다. 자동차를 구입할지 고민하기보다는 자동차 공유 플랫폼에서 오늘은 어떤 차를 골라 탈지 고민하게 될 가능성이 크지 않을까. 엄마는 공유경제가 시작되고 있다고, 우리집이 그 증거라고 이야기한다. 나는 물건을 소유하지 않고 그 용도만을 취하는 세대가 될까.


아파트

나, 세상에 나온지 261일


점심을 먹고 엄마와 차를 타고 밖으로 나왔다. 카시트에 앉아 있으니 따뜻한 볕이 얼굴에 닿았다. 봄볕에 피부 다 상하겠다. 뒷좌석 창문에 햇빛가리개를 얼른 달아줬으면 좋겠다. 깜빡 졸았나 싶었는데 엄마가 트렁크를 열고 유모차를 꺼낸다. 20분 정도 달려간 곳에 공원이 있었다.


호수를 둘러싸고 있는 이곳을 사람들은 호수공원이라 불렀다. 호수공원에는 나무 데크로 만든 걷기 좋은 길이 완만한 곡선을 그리며 나 있었고 곳곳에 커피숍이 있었다. 작년에 개관한 도서관이 공원 안에 있었고 길을 건너면 초등학교도 있었다. 그리고 주변에는 높게 지은 새 아파트들이 많았다.


나는 H와 나란히 유모차에 앉아 공원을 구경했다. 내 눈이 닿는 곳곳에 봄이 있었다. 엄마는 Y이모와 나란히 유모차를 밀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주로 집에 관한 이야기였다. 젊은 나의 엄마와 엄마의 친구는 아직 가진 것이 많지 않아서 이런 멋진 공원을 앞뜰로 두고 있는 집에 사는 꿈을 꾼다. 꿈만 꾼다.


꿈이 현실이 되려면 우리의 부모들은 아주아주 오랫동안 쉬지 않고 일해야 한다. 내가 살아온 날들의 몇 배, 몇십 배 더 오래오래. 그렇게 열심히 돈을 모으면서 한 번씩 허리를 펴고 고개를 들어 얼마만큼 올라왔나 보면 그 아파트는 그새 우리의 부모가 힘겹게 올라온 만큼 더 비싸져 있겠지. 열심히 일한 딱 그만큼. 그 허탈함을 경험하거나 목격한 몇몇의 젊은 어른들은 집을 갖는 것을 지레 포기하고 말기도 하겠지.


산책을 마치고 다시 20분을 달려 집으로 돌아왔다. 저녁으로 명란과 두부와 무를 넣어 끓인 맑은 알탕과 시금치 무침에 밥을 먹고 디저트로 요거트에 버무린 청포도를 먹었다.


16일, 4월, 매해

나, 세상에 나온지 262일


먼 옛날, 나의 반쪽 씨앗은 엄마의 뱃속 깊은 곳에 고이 잠들어 있었다. 언제, 어떤 아기로 세상에 나오게 될지 아무것도 모른 채로. 사람이 될 수 있을지조차도 가늠하지 못한 채로 고요하게, 떨고있었다.


5년 전 오늘, 엄마 뱃속에 떨고 있던 나의 반쪽은 여러 사람의 울음 소리를 들었다. 간절한 마음으로 울고, 상심하여 울고, 분노하며 우는 소리들을 들었다. 울음소리가 만들어내는 파장에 공명하며 어둠 속에서 흔들리고 있었다.


아빠 쪽에서 온 나의 나머지 반쪽은 아직 만들어지기 전이었다. 그 때 어떤 분자들은 내 아빠의 정자가 될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한 채 어쩌면 온 세계를 여행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바람을 타고 대륙을 건너기도 하고 물을 타고 빛이 닿지 않는 심해에 머물렀다던가. 그러다가 어느 날 아빠가 마시는 물컵 안에 자기도 모르게 들어왔을지도.


아직 나의 아빠를 찾지 못한 채 세계를 유랑하던 나의 반쪽들은 그 날 유난히 많은 인사들을 건넸다. 안녕, 안녕, 안녕. 나만 자유로워서 미안해, 미안해, 미안해.





#아기관점육아일기 #훈기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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