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세상에 나온지 303일
어제부터 어깨가 으실으실 콧물은 줄줄 기침도 멈추지를 않더니 결국 오늘 아침 소아과에 다녀왔다. 비가 오는 날의 외출은 아주 아주 오랜만이라 나는 조금 들떠 있었다. 물론 목적지가 병원인지 몰랐기 때문에 누린 잠깐의 호사였지만. 나는 아기띠에 매달려 등을 엄마의 배에 붙이고 걷고 있었다. 기분이 좋아 다리를 흔들었다. 어쩔 수 없이 뒤꿈치로 엄마를 살짝 살짝 차게 되었는데, 글쎄 내 발뒤꿈치가 거의 -과장을 조금 보태서- 엄마 무릎에 닿는 게 아닌가! 내 나이의 앞자리가 3으로 바뀌었다는 것이 바로 실감났다.
낡은 격자무늬 우산 위로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가 유독 크게 들렸다. 그건 아마 빗방울들이 나뭇잎에 머물며 몸집을 불려 우산으로 떨어지기 때문일 것이다. 비오는 날의 나무 아래는 아주 시끄럽구나.
빗속의 산책은 금방 끝나버렸다. 우리는 익숙한 건물에 도착하여 엘리베이터에 탔다. 거울을 보니 콧구멍에 콧물 두 줄기가 매달려 있었다. 돌아오는 길에 다시 본 거울 속 내 얼굴에는 눈물 방울들이 여러 개 매달려 있었다.
감기에 걸렸을 때 가장 불쾌한 것은 사람들이 함부로 내 코를 만진다는 것이다. 병원에서 의사선생님이 콧물을 뽑아낸다며 콧구멍에 호스를 꽂았고, 엄마와 아빠와 할머니 할아버지와 고모할머니와 삼촌이 돌아가며 열심히 내 콧물을 닦았다. 나는 내 코를 도저히 쉽게 허락할 수 없는데 어른들을 코딱지를 빼주겠다며, 콧물을 닦아주겠다며, 심지어는 코가 예쁘다며 내 코를 함부로 만진다. 나는 그 손길을 피하기 위해 몸부림치다가 의자 등받이에 머리를 부딪히기도 했고, 누군가의 얼굴을 때리기도 했다.
나는 언제부터, 왜, 코를 이토록 소중히 여기게 되었을까. 내 추측으로는 아마 아주 어릴 때 겪었던 어떤 공포 때문이 아닐까 싶다. 어릴 때 누군가 내 콧물을 닦아주겠다며 내 코를 잡았다. 코를 막으니 갑자기 숨이 막혀 소스라치게 놀랐다. 나는 그 때 코 대신 입으로 숨쉬는 법을 몰랐다. 짧지만 강렬했던 그 공포가 입으로 숨도 쉴 수 있고, 아예 잠시 숨을 참을 수도 있는 지금까지 남아있는 것일까. 이런 길고 구차한 경험 근거와 관계 없이 그저 콧대에 자존심이 꽉 들어차있기 때문일지도 모르지만.
콧물이 그쳐 내 코가 여러모로 편안했으면 좋겠다.
나, 세상에 나온지 304일
장면 1.
감기 때문에 자꾸만 잠을 설친다. 목이 따끔거리고 코가 막혀 한 시간에 한 두번씩 깨어난다. 잠에서 깬 나를 바로 달래 다시 재워주려고 엄마는 이틀째 나와 함께 잤다. 새벽 다섯 시쯤 깼을 때는 다시 잠들기까지 시간이 오래 걸렸다. 자꾸만 울음이 나왔고, 땀도 많이 났다. 엄마가 분유를 타다 주었다. 따뜻한 분유를 마시니 마음이 조금 안정되었다. 다시 잠들기 위해 엄마에게 안겨 있었는데 그만 토를 해버렸다. 방금 먹은 240ml를 다 토해낸 것 같다. 이불과 엄마의 잠옷과 내 내복이 흠뻑 젖었다. 엄마는 자신의 옷을 모두 벗고 이불을 걷어냈다. 그 동안 나는 잠에서 깬 아빠에게 안겨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장면 2.
점심을 먹고 엄마는 항상 그렇듯이 커피를 한 잔 탔다. 그리고는 어제 다이소에서 사온 모서리 보호대를 거실장에 붙이는 작업을 시작했다. 나는 엄마가 양면테이프를 떼어낸 후 보호대를 거실장 모서리에 하나씩 붙이는 것을 구경했다. 바닥에 버려진 양면테이프 껍질을 씹기도 했는데 엄마는 그것도 모르고 작업에 한창이었다. 순간 엄마가 거실장에 올려둔 커피잔이 내 눈에 들어왔다. 거실장을 잡고 일어서서 까치발을 들고 손을 있는 힘껏 뻗으면 닿을 만한 위치로 보였다. 나는 엄마가 방심한 틈을 타 커피잔을 잡았다. 거실장 위에서 쏟아진 커피는 거실장을 타고 흘러 바닥을 흥건히 적셨고, 내 팔이 모두 젖었다. 이때다 싶어 커피 맛이나 볼까 했는데 엄마가 내 팔을 덥썩 잡았다.
장면 3.
저녁 식사를 마치고 똥을 누었다. 어젯밤 나와 함께 잠을 설친 엄마는 소파에 누워 졸고 있었다. 냄새로 나의 똥의 존재를 알아챈 아빠가 혼자서 똥기저귀 갈기에 도전했다. 아빠는 나를 눕힌 다음 나름 비장의 무기랍시고 내게 자신의 스마트폰을 쥐어주었다. 그리고 기저귀를 열어 물티슈로 내 엉덩이를 닦기 시작했다. 스마트폰이면 똥을 닦을 시간을 벌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은 아빠의 오판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스마트폰 화면을 켜서 나에게 주었어야 했다. 까만 화면만 보이는 스마트폰은 그저 질 나쁜 거울이다. 나는 그것을 던져버리고 더 재미있는 것을 찾아 가기 위해 몸을 뒤집었다. 놀란 아빠는 나를 잡으려다가 내 똥 위를 손으로 짚었다. 그리고는 자신의 손을 바라보며 떨리는 목소리로 ‘경은아’라고 엄마를 불렀다.
나, 세상에 나온지 305일
엄마는 내가 몸을 뒤집지 않는 것을 두고 꽤 오랫동안 걱정했다. 결국 나는 태어난지 165일이 되던 날 뒤집었다. 이제 엄마를 걱정시키지 않아도 되니 아주 뿌듯했다. 하지만 안도의 기간이 길지는 않았다. 곧 엄마는 기지 않는 나를 걱정하기 시작했다. 나는 248일째 되는 날 기기 시작했다. 지금은 거실장 위에 놓인 커피잔도 쏟고 소파도 타고 올라간다. 이제 엄마는 내가 조금만 얌전해지기를 바라는 것 같다. 과거에 했던 걱정들은 모두 잊었나보다.
나는 오늘 만 10개월을 산 아기가 되었다. 10개월이라니, 세월 정말 빠르군.
낮잠을 자고 일어났는데 엄마가 책 한 권을 가지고 기다리고 있다. 눈도 제대로 안 뜬 내게 물을 한 입 주더니 자기 무릎에 앉힌다. 그리고는 책을 펼쳐 손가락으로 짚으며 또박또박 말하기 시작한다. 돼지, 강아지, 고양이, 꿀꿀, 멍멍, 야옹야옹. 인스타그램에서 #10개월아기라고 검색하여 나오는 사진과 영상들을 본 것이 틀림없다. 나는 책에는 별로 관심이 가지 않아 엄마를 무시하고 문짝으로 가서 놀기 시작했다. 엄마는 나를 쫓아와서는 ‘도리도리도리’라고 말하며 머리를 흔들어댄다. 엄청 어지러워보인다. 내가 반응이 없으니 이번에는 두 팔을 머리 위로 둘러 하트모양을 만들더니 ‘사랑해요’라고 한다. 갑자기 웬 고백? 어리둥절해서 다시 문짝을 잡고 놀려고 하는데 자꾸만 고백을 한다. 네, 네, 알아요, 나 사랑하는 거 알아요, 엄마. 결국 내 두 팔을 잡고는 엄마가 했던 것과 같은 포즈를 취하게 한다. 자신을 따라해보라는 뜻이었나보다. 나는 머리가 크고 팔이 짧아서 정수리에 손 끝이 닿지 않는다. 낮잠 푹 잤는데. 피로감이 몰려온다. 엄마를 피해 다른 곳으로 가려는데 매트 위로 나를 다시 데려가더니 혼자 서보라고 한다. 이번에는 중심잡기 연습인가보다. 내 양손을 잡아 일으켜 세우고는 ‘엄마가 손 뗄 테니까 혼자 서 있어봐’라고 하는 것이다. 나는 의지할 데가 있어야지만 설 수 있는데. 엄마는 잡고 있던 내 손을 진짜로 놓았다. 하나, 둘, 셋. 나는 주저앉았다.
배가 고파 밥을 달라고 하니 엄마는 소고기토마토리조또를 차려주었다. 이제야 조금 쉴 수 있는 건가. 숟가락에 소복히 담긴 밥이 참 먹음직스러워 보인다. 나는 입을 크게 벌렸는데 숟가락은 그대로 허공에 멈춰 있다. 숟가락을 든 엄마가 내 눈을 보며 말한다. 맘마,라고 해봐.
나, 세상에 나온지 306일
다른 모든 아기들이 그렇겠지만 나는 과일을 참 좋아한다. 생애 첫 과일이었던 귤에서 시작한 나의 과일 인생은 찬란하다. 귤, 사과, 배, 망고, 딸기, 홍시, 블루베리, 키위, 바나나, 포도, 오렌지, 참외. 여기에 아주 커다랗고 중요한 과일을 하나 더해야 한다. 최신 넘버원, 수박. 단물이 줄줄 흐르는 시원한 수박을 아삭아삭 씹어먹을 때는 어깨춤이 절로 나온다. 생각만 해도 침이 고인다. 맛있는 수박.
나에게 수박을 먹일 때 엄마와 아빠의 차이가 분명하게 드러난다. 엄마는 동그란 수박의 가장 당도가 높은 부분, 그 수박의 진수가 응축되어 있는 부분을 내 몫으로 준다. 아빠는 반대로 수박의 하얀 껍질이 투명하게 남아있는 부분, 절대 정육면체로 썰 수 없는 그 부분을 내 몫으로 준다. 처음부터 너무 맛있는 수박을 맛보면 앞으로 그것보다 더 맛있는 수박을 접할 기회가 적어질테니 불행의 시작이지 않겠냐는 것이 아빠의 설명이다. 어쨌든 요새 먹는 수박은 어느 부분이든 다 맛있다.
엄마는 나의 수박 사랑을 약을 먹이는 데에 이용하기 시작했다. 숟가락에 약을 짜내고 그 위를 수박 조각으로 덮은 다음 나에게 먹인다. 나는 수박을 포기할 수 없어 그냥 약을 함께 먹는 방법을 택했다. 이 방법을 고안해 낸 엄마는 내가 수박으로 덮인 약을 받아먹을 때마다 아주 기뻐하며 어마어마한 칭찬을 날린다. 뭐 나에게도 나쁘지 않은 딜이긴 하다. 세 번 정도만 참으면 약은 다 먹게 되고 이제 남은 수박으로 입가심을 하면 되니 견딜만하다. 이런 걸 두고 윈윈이라고 하는 건가.
나, 세상에 나온지 307일
일어나서 아침을 먹고 돌아다니며 놀고 있었는데 자고 있던 아빠의 알람이 울렸다. 7시. 아빠는 출근 준비를 해야 한다. 출근할 때 아빠는 집 앞 횡단보도만 건너면 탈 수 있는 셔틀 버스를 탄다. 7시 11분에 초록불로 바뀌는 횡단보도를 건너면 때맞춰 도착하는 버스를 탈 수 있다. 그러기 위해 약 10분 동안 출근 준비를 모두 끝내야 한다.
화장실에 들러 거울을 보고, 물을 한 잔 마시고, 옷을 갈아입고, 양말을 신고, 어젯밤에 싸둔 아침을 가방에 챙기면 출근 준비가 끝난다. 아빠는 나를 돌아볼 새 없이 바쁘게 집안을 왔다갔다 하고 있었다. 이렇게 그를 보낼 수는 없어 그의 동선을 가로막았다. 그리고 그의 발목, 무릎, 허벅지를 잡고 일어나 두 손을 뻗었다. 안아줘.
내 요구를 차마 무시할 수 없던 아빠는 나를 들어 안고 거실을 한 바퀴 돌았다.
그 사이 횡단보도의 초록 불이 끝나가고 있었다. 셔틀버스도 떠나가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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