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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주차 | 여름의 맛

by 참깨

바다의 생씨

나, 세상에 나온지 310일



엄마는 생닭이나 생선을 만지기를 꺼린다. 이유는 잘 모르겠다. ‘생’이라는 음절로 시작한다는 공통점만 발견했을 뿐. 그런데 아빠는 엄마의 거부감을 잊는지 혹은 무시하는지 종종 생선이나 생닭을 사오곤 한다. 생닭으로는 백숙을, 생선으로는 구이나 조림을 해달라면서. 그럴 때면 엄마는 일단 생씨 성을 가진 재료들을 냉동실에 던져놓는다. 그리고는 마치 그것들이 우리집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듯, 다른 재료들로만 음식을 만든다. 다른 재료들이 떨어지면 외식을 하자고 한다. 아빠는 냉장고에 어떤 음식들이 있는지 거의 외우고 다니는 것 같다. 때때로 생씨들의 안부를 묻고는 한다.


주말에는 왕조기를 냉동실에서 꺼냈다. 아빠는 혼자서 장을 보러 갔다가 30% 세일하는 왕조기 두 마리를 사왔었다. 이 주일도 더 전의 일이다. 엄마는 고무장갑을 끼고 왕조기를 꺼내 흐르는 물 아래에 잠깐 두었다. 그리고 그것들을 식용유를 둘러 달군 팬 위에 올렸다. 기름이 튀는 소리가 났고, 곧 맛있는 냄새가 온 집안에 퍼졌다. 엄마는 냄새가 난다며 창문들을 모두 활짝 열어두었다.


왕조기 두 마리가 식탁 위에 올라왔다. 내 앞에는 소고기국밥이 놓였다. 먹는 것에 있어서는 진정 다정하고 세심한 나의 사랑스러운 아빠가 나에게도 왕조기를 주자고 제안했다. 엄마가 간을 보더니 짠맛이 거의 없다며 승낙했다. 아빠는 조기의 옆구리살 중 가장 통통한 부분을 골라 발라주었다. 조기 특유의 촉촉하고 부드러운 식감에 담백한 맛이 정말 좋았다. 요리하기 싫어했던 엄마도 맛있다며 인정했다. 나는 빨리 다음 조각을 먹고 싶어 테이블을 두들기며 우우, 아아, 소리를 질렀다. 엄마도 살을 바르기 시작했다. 손가락으로 살점을 만져서 가시가 없는지 확인해야 내 몫이 될 수 있다. 내 식사가 다 끝날 때까지 엄마와 아빠는 조기를 거의 먹지 못했다. 나는 그날 밤에 생선 냄새가 나는 똥을 쌌다.


엄마가 오늘 이른 아침부터 냉동실을 칸칸이 들쑤시고 있었다. 그러더니 진공 포장되어 꽁꽁 얼어있는 고등어를 발견했다고 나에게 귀띔해주었다.


오늘 점심은 흰 쌀밥에 고등어.



읽기

나, 세상에 나온지 311일



엄마는 집에서도, 도서관에서도 책을 들고 나를 쫓아다니지요. 나는 아직 책에 관심이 가지 않습니다. 책을 가지고 할 수 있는 것 중 가장 재미있는 것은 책장에서 책들을 꺼내 바닥에 늘어놓는 것입니다. 바닥에 어지럽게 쌓여 있는 책들을 밟고 더 윗칸에 있는 책들을 꺼내는 것은 한 단계 업그레이드 된 즐거움입니다. 미끄러지지 않도록 중심을 잘 잡아야 합니다.


책 대신 나는 다른 것들을 읽습니다. 경계가 선명한 하늘과 구름을 읽고, 바람의 힘으로 내 손에 달려드는 꽃들을 읽고, 지나가는 자동차와 자전거와 그 안에 탄 사람들을 읽습니다. 놀이터에서 노는 형과 누나들을 읽고 마트에서는 유니폼을 입은 점원들을 읽습니다. 엄마와 아빠도 잘 알지요. 내가 집 앞 놀이터 정자에 얼마나 오랫동안 가만히 앉아있을 수 있는지. 나는 엄마 아빠의 무릎이나 유모차에 앉아서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을 읽고 그것들에 대해 생각합니다.


오늘 엄마는 나와 도서관에 가서 내가 잠들어 있는 동안 책을 읽었지요. 나도 읽었습니다. 높은 천장에 달려 있는 내 몸집보다 커다란 물음표 모양의 모빌을, 궁금한 마음으로 한참을 들여다보며 읽었습니다.


여름의 맛

나, 세상에 나온지 312일



1번 맛. 마트

마트는 좋다. 시원하니까. 텁텁한 공기에 지쳐갈 때쯤 마트에 도착했다. 자동문이 열리고 내가 탄 유모차가 마트 안으로 들어가자 오슬오슬한 냉기에 땀이 식었다. 무릎과 발가락이 조금 시렸지만 그럴 때는 무릎 담요를 덮으면 된다. 문이 없는 냉장고 앞으로 가면 냉기가 더욱 강해진다. 계란, 고기, 채소, 과일, 우유, 치즈 앞을 지나다 보니 허기가 조금 졌다.


계산을 하고 쪼그려 앉아 유모차 장바구니에 허둥지둥 물건들을 담는 엄마를 내려다보고 있자니 안쓰러웠다.


2번 맛. 정자

마트 두 군데를 돌며 필요한 것을 사고 집으로 돌아왔다. 엄마는 더운 날씨에 유모차를 밀고 걷기 힘들다면서 빨리 집으로 가자 했다. 그러더니 집에 들어와서는 나에게 잠깐만,이라고 말하고 혼자 집으로 들어간다. 곧 다시 나타난 엄마의 손에 무언가가 들려 있다. 우리는 다시 집 앞 놀이터의 정자로 나갔다. 엄마는 나에게 빨아먹는 사과 퓨레를 쥐어주었고, 엄마는 설레임을 먹기 시작했다. 그늘 아래에서 바람을 맞으며 쥬스를 마시다니.


놀이터에서는 여섯 살 누나가 비눗방울을 날리고 있었다. 엄마가 누나에게 나 대신 ‘누나 안녕’이라고 인사해주었는데 누나는 자기가 아직 어리기 때문에 누나가 아니라고 했다. 네 살 형아는 비눗방울을 잡으러 뛰어다녔다. 나는 쥬스를 마시며 누나와 형아를 구경했다.



호스트

나, 세상에 나온지 314일



아침을 먹고 바로 다시 누웠다. 평소같으면 집안 산책도 하고 가구와 가전제품을 가지고 놀기도 했을텐데. 내가 다시 이불에 눕자 엄마도 따라 누웠다. 우리는 누가 먼저 잠들었는지 모르게 바로 잠에 빠져든 것 같다. 휴일이었던 어제 제대로 달린 여파가 남아 있나보다.


어제 오후에 나는 호스트 역할을 해야 했었다. 나의 손님 두 명이 자신의 엄마들을 대동하고 우리 집에 방문했기 때문이다. 나의 손님들은 나와 동갑내기 친구들이고 엄마들끼리는 직장 동기 사이이다. 6년 전 우리의 세 엄마들은 같은 날 같은 곳으로 발령을 받았다. 또 모두 같은 해에, 그러니까 3년 전 결혼을 했다. 게다가 작년에는 대략 40일 씩의 터울로 각각 자신의 아이들을 낳았다.


먼저 도착한 친구는 여자친구였는데 나는 여자친구와의 만남이 생전 처음이라 조금 긴장했다. 긴장을 감추느라 많이 웃었다. 여자친구는 나에게 공(내 것이다)을 주었고 나는 내가 물고 있던 쪽쪽이를 허락했다. 우리는 서로에게 무엇인가를 확인한 것 같았다. 나만의 생각일지도 모르지만. 다음에 만나면 무엇이든 더 잘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뒤이어 온 친구는 나보다 생일이 늦는 친구였는데 몸집이 훨씬 큰 것 같았다. 몸집만 보고 살짝 쫄았는데 알고보니 누구에게나 예쁜 미소를 날려주는 순한 친구였다. 우리 셋은 함께 문짝 장난감과 공기청정기를 가지고 놀았다. 각자의 밥과 간식도 먹었고 기저귀도 여러 번 갈았다. 엄마들은 그 동안 계속 대화를 나눴다. 대화의 대부분이 우리 이야기였다. 엄마들이 자주 만날 수 있다면 우리 이야기 말고 엄마들의 이야기도 나눌 수 있을까.


친구들과 놀다가 피곤해서 눈만 붙인다는 것이 그만 긴 잠을 자버렸다. 일어나보니 친구들은 모두 떠나 있었다. 호스트가 되어서 배웅도 제대로 못해주다니. 준비했던 선물도 깜빡하고 쥐어주지 못했다. 처음이라 많이 서툴렀다.




#아기관점육아일기 #훈기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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