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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주차 | 엄마 여기 있네

by 참깨

다들 왜 눈을 감고 있어?

나, 세상에 나온지 317일



아침에 일어나면 가장 먼저 분유를 먹는다. 밤새 한 끼도 먹지 못했으므로 배가 많이 고프다. 엄마는 어젯밤 미리 보온병에 담아 놓은 따뜻한 물로 분유를 타서 나에게 준다. 나는 이불에 누워서 분유를 먹는다.


다 먹고 엄마를 보면 엄마가 내 옆에 누워서 눈을 감고 있다. 요즘 따라 자주 그런다. 내가 다가가도 여전히 눈을 감고 있다. 엄마의 눈에 손가락을 넣어본다. 엄마가 눈을 뜬다.


밤에 자기 전에 나는 자꾸 눈물이 난다. 아빠는 그런 나를 안고 방으로 들어간다. 전등이 모두 꺼진 적막하고 어두운 방은 울기에 딱 좋은 장소다. 나는 이불에서 데굴데굴 구르며 운다. 문쪽으로 기어가서 닫힌 방문을 두드리기도 한다. 아무도 대답하지 않는다. 옆에 있는 딸랑이를 흔들며 운다. 책장에서 책을 뽑으며 운다. 그러다가 뒤를 돌아보면, 아빠가 내 이불에 길게 누워 있다. 아빠 몸을 타고 넘다가 그의 얼굴을 보았다. 아빠도 엄마처럼 눈을 감고 있다. 아빠 눈에도 손가락을 넣어볼까.



상대성 이론

나, 세상에 나온지 318일



상대성 이론은 빛과 시간에 관한 이론이라고 한다. 빛과 시간에 관해서라면 나도 꽤 아는 바가 있다.


대체로 아빠는 일정한 시각에 돌아오지만, 우리가 느끼는 그의 부재 시간은 매일 아주 다르다. 비가 오거나 미세먼지가 많아 바깥에 나갈 수 없는 날 우리의 기다림은 아주 길어진다. 반대로 햇빛이 비구름이나 미세먼지의 방해를 받지 않고 내 정수리에 온전히 도달하는 날, 여기저기 갈 곳과 이것저것 할 것이 많은 날에는 금방 아빠가 문을 열고 돌아온다.


오늘 우리는 엄마의 친구인 YJ와 내 친구인 HJ와 뷔페에서 점심을 먹었다. 맛있는 음식과 많은 사람들 속에서 우리는 여유있는 식사를 했다. 긴 식사를 끝내고 산책길에 나섰다. 태양빛이 만들어내는 초록이 선명한 천변을 걷고, 그늘에 앉아 쉬었다. 오늘 우리는 갈 곳도, 할 일도 많았다. 빛이 아주 좋은 날이었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집에 돌아오니 아빠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퇴근하는 길이라고 했다.


매일, 아니 하루에 잠깐씩이라도, 빛이 있으라!


여름밤 드라이브

나, 세상에 나온지 319일



밤 11시가 넘었었나. 엄마와 아빠가 자동차키와 지갑만 챙기더니 내복 바람의 나를 안고 현관문을 열었다. 나는 이게 다 무슨 일인가 싶었는데 조용히 켜져 있는 가로등 아래를 지나갈 때 서늘한 바람이 불어왔다. 그냥 즐기기로 했다.


이렇게 늦은 밤 외출하는 일은 내 나이의 아가들에게는 아주 드문 일이어서 나는 잠도 잊고 꽤 신이 났다. 카시트에 앉아 바라보는 밤의 풍경은 예상보다 덜 어두웠고 더 밝았다. 자동차들은 모두 눈이 부실 정도로 환한 빛줄기를 내뿜으며 달렸다. 나는 한 손에 턱을 괴고 창 밖을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사정은 이렇다. 내일 일찍 운전해서 출근해야 하는 아빠를 위해 엄마가 기름을 넣어 오겠다고 호기롭게 나갔는데 주유소에 도착해보니 지갑이 없더란다. 엄마는 지갑을 가지러 다시 그 길을 돌아왔고, 주유소로 가는 두 번째 길은 그냥 다 같이 드라이브 삼아 다녀오기로 한 것이다. 우리는 언제 멈춰설지 모르는 차를 타고 주유소에 다녀왔다. 저렴한 곳에서 넣겠다고, 집에서 꽤 떨어진 곳까지 갔다. 가는 길에는 마음이 조마조마했고, 돌아오는 길에는 마음이 빵빵했다.



공부?

나, 세상에 나온지 320일



오랜만에 S이모가 우리집에 놀러왔다. S이모는 내가 아직 뒤집지 못할 때 나를 한 번 보았고 그 뒤로 오랜만에 다시 우리집을 찾았다. 이모는 내가 그 사이에 많이 자랐다고 해주었다. 나도 ‘이모도 그 사이에 많이 달라졌네’라고 말해주었다. 물론 ‘워’라는 소리밖에 나오지 않았지만. 나는 이모가 마음에 들어서 이모에게 꽃 미소를 날려주었다. 눈을 바라보며 대화도 나눴다.


S이모는 이번에 대학원에 진학하게 되었다. 어려운 시험을 통과했다고 했다. 시험을 보기 위해 공부를 많이 했고, 앞으로 더 많은 공부를 해야한댔다. 이모는 앞으로 하고 싶은 공부에 대한 이야기를 엄마에게 들려주었다. 의궤, 예악, 여말선초 등의 단어들이 이모의 입에서 자연스럽게 튀어나왔다. 그 이야기를 하며 이모는 아주 즐거워 보였다. 시험을 치르기 위해 공부할 때 많이 힘들었다고 했으면서, 공부가 또 하고싶다니.


공부는 무엇이길래 왜 다 큰 어른들을 들었다 놨다 하는 것일까.


엄마 여기 있네

나, 세상에 나온지 321일


아침에 일어나보니 아무도 없었다. 내 방문은 살짝 열려있었고, 적막했다. 푹 자고 일어나서 기분이 좋았으므로 울 필요가 없었다. 나는 방문을 열어젖히고 엄마를 찾아 나섰다.


엄마를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안방에서 불빛이 새어나오고 있었으므로. 안방으로 들어갔다. 반쯤 열린 화장실 문이 보인다. 그곳에 분명 엄마가 있다.


화장실 문을 안으로 고개를 빼꼼 내미니 엄마가 앉아 있었다. 엄마는 엄청 놀란 눈치였다. 곧 나를 향해 에비, 에비 하며 손을 휘휘 저었다. 아침에 일어나 처음 듣는 말이 에비라니. 나는 조금 서운해 엄마에게 다가가려고 화장실 안에 한쪽 손바닥을 댔다. 엄마는 아까보다 더 큰 목소리로 에비, 에비 하더니 들고 있던 스마트폰을 내 앞에 슬라이딩으로 던져주었다.


점심을 먹고 집 근처로 마트 산책을 나갔다. 오늘 저녁 고기를 구워먹을 거라며 마트 세 군데를 돌며 양배추와 토마토와 버섯같은 것들을 샀다. 이제 고기만 사면 되겠다, 싶었는데 엄마가 갑자기 뛰기 시작했다. 내 유모차는 정육점 앞을 쏜살같이 달려 지나쳐버렸다. 엄마, 정육점 아직 안 들렀는데? 엄마는 빨간 신호 앞에서 안절부절 못하더니 신호가 바뀌자마자 탄환처럼 횡단보도를 건넜다. 유모차가 아니라 자동차를 탄 것 같았다. 기분이 좋았는데 이상하기도 했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보행기에 태워졌다. 그리고 엄마는 사라졌다. 이번에도 엄마를 찾기는 어렵지 않았다. 아침에 앉아있던 그곳에 똑같이 앉아있었다.



#아기관점육아일기 #훈기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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