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세상에 나온지 324일
금요일 저녁. H이모와 J삼촌이 놀러왔다. 둘은 부부이고, 곧 부모가 된다. H이모가 J삼촌에게 나를 한 번 안아보라 했다. 아기 안는 연습을 하는 거라고 했다. J삼촌과 나는 처음 보는 사이지만 기분 좋게 안겼다. 나는 선한 인상을 가진 사람에게 관대하다. 나를 안고 어쩔줄 몰라 하는 삼촌에게 안겨 있자니 약 320일 전의 느낌이 되살아났다. 엄마 뱃속에서 나온지 얼마 되지 않았을 무렵, 아빠는 겉싸개에 싸인 나를 어떻게 안아야할지 몰랐다. 아빠의 긴장된 팔뚝과 가슴 근육을, 나에게까지 전해지도록 요동치던 심장박동을 잊을 수가 없다. J삼촌도 부디 좋은 아빠가 되기를.
토요일 낮. 삼촌이 놀러왔다. 이번에는 아빠의 동생, 나의 친삼촌이다. 함께 저녁을 먹고 아빠와 삼촌과 나는 함께 공놀이를 했다. 새러데이 멘즈 데이! 규칙은 이렇다. 아빠는 나를 안고 있고, 삼촌은 공을 토스한다. 나는 그 공을 헤딩으로 처리하면 된다. 나는 머리를 공에 갖다 맞추는 것보다 공이 내 눈 앞에서 휙휙 날아다니는 모습을 보는 게 더 재미있었다. 쉽지는 않았지만 몇 번 헤딩을 성공하기도 했다. 기분좋게 다 놀고 나서 바닥으로 내려와 앉으니 흥분이 가라앉으며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아빠는 나를 안고 있었다. 삼촌은 나에게 공을 던졌다. 둘이 공으로 나를 맞추며 논 것이 아닌가?
일요일 오후. 잠결에 자꾸만 따뜻한 바람이 내 발가락을 간지럽혔다. 땅, 땅, 땅하는 탄성있는 물체가 여기저기 부딪히며 내는 소리가 아른거렸다. 달게 자고 일어나니 사방이 온통 초록이다. 유모차 아래의 땅도, 초록 땅을 둘러싼 펜스도, 초록 펜스를 둘러싼 나무들도 모두 초록색. 엄마, 아빠가 내가 자는 동안 또 테니스를 쳤나보다. 이미 둘은 땀범벅이다. 둘은 바닥에 흩어져있는 공들을 한곳에 모아 바구니에 넣으며 말했다. “나중에 훈기 걸을 수 있게 되면 공 주워오기 시키자.” “훈기 좋아하겠지?” 뭔가 손해보는 것 같지만, 공 주워오기라니.
재.미.있.겠.다.
나, 세상에 나온지 325일
엄마, 아빠는 종종 냉장고에서 맥주를 꺼낸다. 하얗게 물방울이 맺혀 있는 캔이나 병이 음식과 함께 식탁에 놓여있는 모습을 자주 보았다. 아직 (당연히) 맥주를 마셔본 적은 없지만 어른들이 그것을 마시는 장면을 몇 번 보다보니 나도 이제 맥주가 무엇인지 안다. 놀랄 만큼 차가운 것(아빠는 맥주를 냉장고에서 꺼내자마자 꼭 내 이마나 볼에 갖다댄다), 캬 소리가 나는 것, 얼굴을 붉게 물들이는 것, 목소리가 커지게 하는 것.
여기까지는 내가 맥주를 마시는 어른들을 관찰한 사실이다. 그런데 이게 전부가 아닌가보다. 아직 내가 보지 못해서 알지도 못하는 술에 관한 사실도 있다고, 엄마는 나에게 이야기해주었다. 그리고 그 행동들을 내가 매일 하고 있다고도 했다.
엄마는 내가 졸릴 때 하는 행동이 술에 취한 사람이 하는 행동과 똑같다고 말했다. 어린애가 주정을 한다고.
잠이 오면 나는 꺽꺽 운다. 별 것 아닌 것에도 깔깔대며 웃는다. 책장을 잡고 비틀거린다. 꾸벅꾸벅 존다. 졸았으면서 졸지 않은 척 한다.
어른들이 술에 취하면 나와 같은 행동을 한다니.
술이란 것은 분명 마시면 마실 수록 잠이 오게 만드는 음료임이 틀림없구나.
나, 세상에 나온지 326일
나는 아파트에 산다. 내 유모차 바퀴는 보도블럭과 아스팔트 위를 부드럽게 굴러간다. 집 앞에 있는 놀이터 바닥은 모래 대신 탄성고무매트로 덮여 있다. 내가 걷게 된다면 아마 보도블럭과 아스팔트와 탄성고무매트 위를 제일 먼저, 제일 많이 밟게 될 것이다.
우리집 근처에는 작은 동산이 있다. 언제나 나무 그늘로 덮여 있는 그 곳은 부드럽게 젖은 흙으로 덮여 있다. 나무 줄기로 개미들이 쉴새 없이 오르내리고 이름을 알 수 없는 새들이 쉬어간다. 비가 오면 흙탕물이 흐르고 호흡을 위해 밖으로 나온 지렁이들이 꿈틀댄다. 유모차로는 올라갈 수 없는 곳이다.
동산 너머에 도서관이 있다. 옥상에 텃밭이 있는 도서관이다. 텃밭을 가꾸는 사서님이 우리에게 자라나고 있는 식물들을 보여주셨다. 가지, 토마토, 옥수수, 블루베리처럼 내가 먹어 본 열매가 달린 식물들은 나도 알아볼 수 있었다. 달맞이꽃, 인동초, 무의 줄기와 꽃은 처음 보는 것들이었다. 주로 아스팔트에서 자란 엄마 역시 처음 보는 식물들이라 했다.
우리는 로즈마리와 애플민트 줄기 몇 가닥을 얻어와서 물병에 꽂아 베란다에 두었다. 베란다 문을 열 때마다 식물의 냄새가 바람과 함께 들어온다.
나, 세상에 나온지 327일
늦잠을 자고 일어나보니 엄마는 내가 갈아입을 옷과 외출 가방을 준비해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먹을 밥도 대기중이었다. 엄마의 도움을 받아 밥을 먹고, 세수를 하고, 머리카락에 물을 발라 가르마를 탔다. 내 얼굴에 유독 잘 받는 색깔인 노란 티셔츠를 입고 새 양말도 신었다. 엄마는 나에게 선글라스도 씌우려 했지만 단호하게 거부했다.
약속장소는 서울이었다. 서울행 도로에는 차가 많았다. 지나가는 차라도 구경하며 시간을 떼우고 싶었는데 창문에 걸린 햇빛가리개가 무심히 내 시야를 방해하고 있었다. 나는 답답한 마음에 소리를 질렀다. 운전중인 엄마가 당황하며 가방에서 과자를 꺼내 거의 던져주듯 나에게 건넸다.
차에서 내려 가까운 건물로 들어갔다. 흰 바닥과 흰 벽과 흰 천장으로 둘러싸인 공간이었다. 온통 하얀 배경의 그곳에는 크고 작은 그림들이 걸려있었다. 벽에 가까이 다가서면 그림이 보이고, 한 발 물러서면 그림을 그린 사람과 바라보는 사람이 함께 보이는 곳이었다. 그림에 눈이 팔려 있는데 곧 경은아,하는 소리가 들렸고 엄마가 언니,라고 대답했다. 들어보니 그곳은 갤러리라 부르는 곳이었고, ‘언니’는 그곳의 대표였다.
나는 ‘언니’에게 미소와 예쁜짓을 선사하며 이 무대의 주인공이 되기 위한 웜업을 시작했다. ‘언니’는 내가 얼마나 예쁜지에 대해 말하며 꽤나 진지하게 반응했다. 리액션까지 들었으니 웜업은 끝났다.
엄마와 ‘언니’가 대화를 시작했다. 엄마가 친구들을 만나면 대부분 내 이야기를 하므로 나는 거기에 맞춰 적절한 타이밍에 웃어주고 개인기를 보여주기만 된다. 초승달 눈을 만들어 웃어보이거나 혼자 젖병을 들고 분유를 먹기만 해도 대부분의 어른들은 나의 팬이 되어버린다.
그런데 오늘은 조금 달랐다. 둘의 화제는 나에게서 조금 머무는가 싶더니 곧바로 자신들에게로 옮겨갔다. 만나지 못했던 몇 년 동안의 삶과, 현재의 삶과, 준비하고 있는 삶에 대해. 엄마는 아빠를 만나기 훨씬 전의 일들부터 지금까지의 일들을 요약해서 이야기했다. 그리고 ‘언니’에게 많은 것을 물었다. ‘언니’는 엄마의 질문마다 가장 적절한 대답을 내놓았다. 둘의 대화가 길어졌고 나는 조금 초조해졌다. 이렇게 무대 아래에서 오래 대기하기는 처음이었다. 둘은 내가 등장할 타이밍을 주지 않았다.
둘이 대화를 나누는 동안 나는 끼어들어보기도 했고, 심통을 내보기도 했지만 잘 먹히지 않았다. 엄마는 나를 안고 어르면서도 대화를 이어나가며 무대에서 내려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할 수 없이 꽤 오래 둘의 대화를 들을 수밖에 없었다. 듣다 보니 내 주변의 어른들에게서는 들을 수 없는 삶의 모습을 ‘언니’에게서 들을 수 있었다. 또 무엇보다 엄마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내 이야기를 빼고도 엄마에게는 할 말이 많았다.
나, 세상에 나온지 328일
엄마는 주로 내 모습을 사진으로 찍는다. 찰칵 찰칵 소리가 나면 나는 웃어보임으로써 피사체로서의 역할에 최선을 다한다. 가끔 엄마가 내 앞에 스마트폰 렌즈를 들이밀고 오랫동안 렌즈 너머로 나를 관찰할 때가 있다. 찰칵 찰칵 소리가 나지 않는다면, 그건 비디오를 찍고 있는 것이다. 주로 내가 새로운 행동을 시작할 때, 그리고 주로 그 행동이 어른들을 기쁘게 하는 것일 때 작은 렌즈가 나타나 나를 오랫동안 들여다본다.
엄마와 아빠는 내 앞에서 꽤 오랜 기간 머리를 흔들어댔다. 엄마는 어지럽다며 짧게짧게 흔들었고 아빠는 침이 튀도록 흔들었다. 나는 엄마, 아빠가 왜 머리카락이 흩날리도록 머리를 흔들어대는 걸까 궁금했다. 엄마는 오늘도 어김없이 내 앞에서, 집 안도 아닌 바깥에서 머리를 흔들어댔다. 혹시나 해서 엄마를 따라해보았더니 엄마가 스마트폰을 꺼냈다. 그리고는 길게 이어지는 촬영. 아, 그렇구나. 지금까지 엄마, 아빠는 내가 따라해주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머리를 흔들었던 거구나.
#아기관점육아일기 #훈기일기
https://www.instagram.com/babyhoong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