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세상에 나온지 331일
이번 주말에도 테니스장에 갔다. 지나번과 달리 이번에는 코트에서 낮잠을 자지 않았다. 오늘은 게스트도 있었으므로 나도 함께 손님을 맞이해야 했다. 엄마 아빠와 고모(아빠의 사촌동생), 고모부, 삼촌(아빠의 사촌동생2)까지 다섯 명의 어른들은 초록의 코트 위에서 분주하게 움직였다.
그늘에 깔아 놓은 매트 위에 앉아있으면 어른들의 다리가 가장 먼저 보였다. 모두들 공 하나에 일희일비하며 열심히 공을 쫓아 달렸다. 긴 다리로 성큼성큼 뛰는 사람도 있었고, 작은 스텝으로 빠르게 발을 놀리는 사람도 있었다. 카페트처럼 깔린 초록의 코트 바닥에서는 어른들이 방향을 바꾸며 앞으로 뛰어나갈 때마다 모래가루가 떠올랐다 다시 가라앉곤 했다.
집에 돌아오는 길에는 소나기가 내렸다. 창밖에 세차게 떨어지는 빗줄기를 보며 돌이켜보니, 나는 오늘 한 번도 코트로 나가지 못했다. 나는 내내 매트에 앉아 있거나, 누군가에게 안겨 있었다. 엄마, 아빠는 내가 실외에서 기어다니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나도 이제 필드로 나갈 준비를 해야 할 때가 된 것 아닐까. 두 발에 힘을 주고 혼자 걸어야 할 시기가 온 것이 아닐까. 코트에 나가 공이라도 주워야하는 것이 아닐까.
나, 세상에 나온지 332일
엄마, 내가 기저귀 가방을 몇 번 열어보았어. 거기엔 먹을 것들이 잔뜩 들어 있었어! 퓨레, 치즈, 과자. 전부 내가 좋아하는 간식들이야. 젖병, 물병도 있고 가끔 밥이 들어있을 때도 있어. 이게 끝이 아니야 작은 장난감도 들어있고, 쪽쪽이도 들어있고, 손수건이랑 기저귀랑 물티슈도 잔뜩 들어있었어. 엄마, 이 가방만 있으면 나는 하루 정도 집에 들어가지 않고도 살 수 있겠다.
이제 엄마 가방을 열어볼까? 지갑이 들어있네. 자동차 열쇠도 들어있네. 썬크림이랑…스마트폰도 있잖아?
엄마, 이 가방 두 개만 있으면 우리는 어디든 갈 수 있을 것 같아. 매일 가는 곳만 가지 말고, 어디든 더 재미있는 곳으로. 너무 덥고 습해지기 전에 어디든 가보자.
나, 세상에 나온지 333일
저녁을 먹으러 밖으로 나온 김에 엄마의 테니스 레슨을 구경가기로 했다. 외출은 언제나 옳고, 흔치 않은 밤외출은 더욱 더 옳다.
엄마가 스트레칭을 하는 동안 아기띠로 나를 안은 아빠는 다른 사람들의 랠리를 구경했다. 그들이 서브를 넣을 때마다 아빠의 몸이 움찔움찔했다. 좋은 샷이 나오면 잘치네,라고 말했고 실수를 하면 아빠도 함께 아쉬워했다. 아빠는 계속 같은 혼잣말을 반복했다. 치고싶다. 치고싶다. 아, 치고싶다.
엄마의 레슨 차례가 왔다. 엄마가 테니스치는 모습은 몇 번 본 적이 있었다. 그때는 나름 실력이 늘고 있다고 자부심을 보였던 것 같은데. 레슨을 받는 모습은 별로 그렇지 않았다. 엄마는 분명 열심히 뛰어다니는 것 같은데 공은 자꾸만 이상한 곳으로 날아갔다. 코치님의 한 마디 한 마디에 엄마가 점점 작아지는 것 같았다. 스윙을 끝까지 해야죠, 발을 빠르게 움직여야죠, 라켓을 위로 들어야죠, 공을 끝까지 봐야죠, 라켓에 힘을 더 실어야죠. 레슨이 끝나자 엄마는 거의 나만큼 작아보였다. 아빠가 그래도 전보다 늘었다며 엄마를 위로하니 조금 회복된 것 같았지만 여전히 작아보였다. 한 두 돌 아기 정도?
돌아오는 길은 의기소침해 작아진 엄마와 아쉬움에 마음이 허한 아빠와 함께였다. 빗방울이 조금씩 떨어지고 있었다.
나, 세상에 나온지 334일
엄마의 마우스를 가지고 놀다가 떨어뜨려 깨버렸다. 엄마는 거의 울 것 같았다. 금이 조금 간 걸 가지고 왜 그렇게 정색하나 했는데 완전히 망가져 못쓰게 되었다고 한다. 게다가 아빠가 엄마의 생일에 선물한 첫 선물이었다고 한다.
사실 나에게는 내 전용 마우스가 있다. 내가 마우스에 관심을 보이자 엄마가 내가 가지고 놀 수 있는 마우스를 만들어준 것이다. 쓰지 않는 마우스를 가져다가 닦고, 선 끝에 달린 위험한 부분을 손수건으로 감싸니 내 것이 되었다. 누르면 클릭 클릭 소리도 나고 작은 휠을 손가락으로 돌릴 수도 있고 심지어 내가 좋아하는 전선까지 달려있지만. 왠지 별로 흥이 나지 않는다. 진짜 어른들이 사용하는 물건에만 있는 매력이 없다. 그러니 손이 닿지 않는 높은 테이블 위에 놓여 있는 다른 마우스가 자꾸만 탐이 났다. 그러다가 하나를 깨버린 것이고.
다행히 나에게는 아직 하나가 더 남아 있다. 이번엔 아빠의 마우스다.
나, 세상에 나온지 335일
태어난지 130일이 조금 넘었을 때였다. 몸이 떨리도록 추워 잠에서 깼다. 그 때는 겨울이었으니 난방에 문제가 생긴 건가 싶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추운데 자꾸 땀이 났다. 더 이상하게 나는 너무 추운데 엄마와 아빠는 내 옷을 기저귀만 남기고 홀딱 벗겼다. 그리고는 자꾸만 차가운 물수건으로 내 몸을 문질렀다. 차가운 물수건이 몸에 닿을 때마다 나는 싫다고 소리를 질렀는데 나의 부모는 묵묵부답이었다.
소변줄을 꽂을 때, 링거 바늘을 꽂을 때. 나는 내가 작고 힘이 없는 것이 너무 서러웠다. 하지 못하게 하고 싶은데 어른들이 내 팔과 다리를 붙들어 움직이지 못하게 했다. (지금은 힘이 무지 세져서 어른들 마음대로 하도록 놔두지 않을텐데…) 요로감염이라는 진단을 받고 입원을 했다. 오줌을 관장하는 내 몸의 여러 부분 중 어느 한 부분이 조금 느슨해져 있어 감염이 쉽게 되었다 했다. 6개월 뒤에 다시 검사해보자는 말과 함께 3박 4일 간의 입원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다.
오늘이 약속했던 검사날이었다.
좋아지고 있으니 1년 뒤에 다시 봅시다,라는 말을 듣고 우리 셋은 당연히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태평한 반응을 보이느라 각자 조금씩 애를 썼다. 그리고는 평소와 다름 없는 하루를 보냈다.
#아기관점육아일기 #훈기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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