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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주차 | 첫걸음

by 참깨


누가 나를 부르지

나, 세상에 나온지 338일



‘요새 엄마는 나를 잘 안아주지 않는다’고 말하면 엄마가 섭섭해하려나. 정확히 말하면 엄마는 요새 나를 안고 일어나는 걸 힘들어한다. 내가 힘이 세지고 무거워지고 있는 만큼 엄마는 나이가 들어가고 있기 때문이란다. 전에는 나를 가뿐히 안아 들고 움직였는데, 몇 달 사이에 그게 그렇게 힘들어졌단다.


대신 엄마는 나를 옮기고 싶을 때나 나를 부르고 싶을 때 새로운 방법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내가 오기를 바라는 곳에서 내가 좋아하는 소리를 내는 것이다.


나를 화장실에 데려가 씻기고 싶으면 화장실 문 옆에 있는 피아노 뚜껑을 연다. 무거운 피아노 뚜껑이 열리며 내는 둔탁한 소리를 나는 집 안 어디에서든 들을 수 있다. 그럼 나는 피아노까지 쏜살같이 달려(기어)간다. 까치발을 해도 건반이 잘 보이지 않지만 손가락의 감각으로 건반을 이것저것 눌러본다. 높은 소리를 듣고 싶으면 오른쪽으로 이동하면 된다. 내가 피아노를 치는 동안 엄마는 내 바지를 벗기고 겨드랑이에 손을 넣어 들어올려 화장실로 데리고 간다. 똥을 닦아야 하기 때문이다.


내 방에서 스테인레스 보울 두 개를 맞부딪히는 소리가 나면 그건 엄마가 함께 뒹굴거리자며 나를 방으로 부르는 중인 거다. 나는 보울 두 개를 가지고 장단을 만들며 논다. 챙챙챙,하는 꽹과리 비슷한 소리에 흥이 나는 걸 보면 나는 한국사람인가보다. 방으로 들어가 보면 엄마는 내 이불에 모로 누워서 보울을 두들기고 있다. 엄마에게 보울을 받아들고 소리를 내며 조금 놀다가 엄마 옆에 눕는다. 같이 누워 뒹굴거리다가 함께 까무룩 잠이 들어버리는, 소중한 오후의 한 자락이 지나간다.


이발

나, 세상에 나온지 339일



머리를 자르러 가는 거면 그렇다고 말이라도 해줬으면 좋았을텐데. 엄마는 아무 말도 없이 나를 차에 태웠다. 전화로 어딘가에 예약을 하는 것 같았는데 그게 미용실 예약이었나보다. 머리카락이 많이 길어나긴 했었다. 땀이 나면 이마에 미역 여러 가닥이 붙어 있고, 옆머리가 자꾸만 귓구멍으로 말려 들어갔다. 자를 때가 되긴 했지.


그래도 엄마 뱃속에서부터 소중하게 길러온 내 머리카락을 이렇게 단번에 밀어버리다니. 아쉽고 원망스러워서 눈물이 났는데 되돌릴 수는 없었다. 이미 바리캉이 내 머리를 여러 번 훑고 지나간 뒤였으니까. 바닥에 떨어진 머리카락 안녕, 시트에 떨어진 머리카락 안녕, 내 입에 들어간 머리카락 안녕, 수채구멍으로 물과 함께 빨려들어간 머리카락도 안녕. 너희는 한가닥 한가닥 소중한 나의 배냇머리였어.


머리를 깎고 나서 엄마가 자꾸만 사진을 찍는다. 다른 아기 친구들도 있는데 예쁘다는 말을 남발한다. 부끄럽게 말이다. 미용실에서 나와 엘리베이터를 타고 나니 엄마의 말이 과장이 아니었구나 싶다. 거울에 비치는 얼굴이 내가 보기에도 말끔하다.


나, 짧은 머리도 꽤 잘 어울리는듯.


첫걸음

나, 세상에 나온지 340일



머리를 자르니 아기가 아니라 어린이같다고, 엄마가 말했다. 엄마는 그 말을 여러 사람들에게 전하며 동의를 구했다. 아빠에게도, 삼촌에게도, 할머니에게도, 할아버지에게도. 모두가 그렇다고 맞장구쳐주었다.


거실장을 잡고 서있다가 문짝으로 가서 놀고 싶었다. 기어가기위해 바닥에 앉으려다가 갑자기 아주 진지하게 귀.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작은 서있더라도 이동하기 위해 엎드려야 하고, 도착해서는 다시 일어서야 한다. 짧은 거리를 이동하기 위해 직립과 포복과 직립을 반복하는 것은 너무나도 비효율적인 방법이다. 지금껏 수도 없이 해왔으면서 왜 오늘에서야 이 방식이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을까.


나는 엎드리지 않고 서서 이동할 수 있을지가 궁금해 한 발을 떼어 내딛어 보았다. 넘어지지 않길래 한 발을 더 떼어 보았다. 그리고 한 발 더.


세 걸음으로 문짝까지 가기엔 아직 내 다리가 많이 짧았다. 그래도 서서 조금이라도 이동했다는 게 내심 뿌듯했다. 어린이가 된 것 같다는 엄마의 말이 주문이 될 걸까?



슬픔을 아는 마음

나, 세상에 나온지 341일



엄마는 나를 외할머니댁에 맡겨두고 잠시 어디에 다녀오겠다고 했다. 검은 옷을 입은 엄마는 나가기 전 할머니와 이야기를 나누며 여러 번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엄마가 없는 동안 나는 할머니와 장군과 있었다. 할머니댁에 사는 푸들인 장군은 나이가 아주 많다. 젊었던 시절 윤기나게 빛났을 갈색 털은 하얗게 새어 있고 거의 소파에 엎드려 잠을 자며 지낸다. 소파를 잡고 일어서면 엎드려 있는 장군과 같은 눈높이가 된다. 나는 장군과 친해지고 싶어 장군의 손을 잡아보았다. 곱슬거리는 털과 까만 발톱을 느낄 새도 없이 손을 빼며 나를 피한다. 나를 거부하는 존재가 있다. 슬픈 일이다.


엄마가 돌아왔다. 현관에 들어서서 나를 보는 엄마의 얼굴이 평소와 다르다. 슬픔을 겪어 본 나는 알 수 있다. 지금 엄마의 마음에도 슬픔이 들어있다. 엄마는 돌아오는 길에 네비게이션의 안내를 몇 번이나 놓쳐 오래걸렸다며 나를 안아주었다. 오래걸렸어도 무사히 돌아왔으니 나는 괜찮다고, 나도 엄마를 안아주었다. 엄마의 몸이 살짝 뜨겁고 축축했다.


청량한 밤

나, 세상에 나온지 342일


엄마, 아빠가 나란히 맥주캔을 따는 것을 보니 오늘이 금요일인가보다. 맥주를 마시는 부모의 옆에 앉아 오렌지를 먹으며 들으니 오늘 엄마에게 좋은 일이 있는 것 같다. 엄마는 흥이 올랐고, 평소보다 말이 길었다.


엄마가 쓴 글이 네이버 메인화면에 소개되었다고 했다. 나에 대한 글이기도 하고, 아빠에 대한 글이기도 하고, 엄마에 대한 글이기도 한데 그 글을 많은 사람들이 읽게 되어 기분이 좋다고 했다. 내 이름이 실명으로 실려 있다며 내가 너무 유명해지면 어떡하냐는 등의, 하지 않아도 될 걱정도 했다.


맥주 캔을 따는 소리만큼 청량한 밤이 이렇게 지나간다. 낮의 더위는 기억도 나지 않는다.




#아기관점육아일기 #훈기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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