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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주차 | 300

by 참깨

그럴 마음은 없었지만

나, 세상에 나온지 296일



엄마의 어깨에는 부황 자국이 여러 개 있다. 경계선이 매끈한 보라색 원이 어깨에 일정한 간격으로 보인다. 아빠의 양 팔에는 밴드 자국이 하나씩 있다. 팔의 다른 부분보다 확연하게 밝은 피부가 손목에 한 줄씩 남아 있다. 뙤약볕 아래에서 테니스를 치며 매번 같은 자리에 손목 밴드를 차기 때문이다.


엄마의 어깨와 아빠의 팔에는 부황 자국과 밴드 자국 이외에 같은 모양의 자국이 있다. 내 잇자국이다. 아빠는 엄마보다 더 순발력이 좋은지 거의 무시해도 좋을 잇자국이 여러 번 생겼다 사라졌다. 반면 엄마의 어깨에는 빨갛고 파란 잇자국이 여러 개 있다.


잠이 와서 울며 엄마에게 안겼다. 나는 울 때마다 어딘가에 얼굴을 묻으면 조금 편안해진다. 엄마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는데 엄마가 갑자기 소리를 질렀다. 나는 놀라서 더 크게 울었다. 그러더니 나에게 무서운 목소리로 뭐라고 뭐라고 말하기 시작했다. 나를 바닥에 내려놓고 계속 말했다. 자기의 어깨를 가리키고 내 입을 가리키면서 자꾸만 뭐라고 했는데 내 울음소리에 섞여 그 말의 의미는 희미하고 엄마의 단호한 표정만 선명했다.


엄마는 연고를 가져다 자기 어깨에 발랐다. 내 엉덩이에 자주 발라주던 연고다. 그리고 나를 한 번도 더 안아주지 않았다.


도서관 이용자 1인

나, 세상에 나온지 297일



오늘은 1층에 잠깐 머물고 싶다며 엄마는 나에게 소리를 작게 내주기를 부탁했다. 엄마는 나를 유모차에 앉혀 놓고 책을 읽었다. 그동안 나는 쪽쪽이를 빨다가, 주스를 마시다가, 책을 찾는 형아를 구경하다가, 그만 심심해져버렸다. 소리를 질러 내 의견을 전달했더니 엄마는 하는 수 없이 어린이 층인 지하로 나를 데려가 주었다.


내 또래 아가들도 있고, 옹알이를 조금 크게 해도 괜찮은 지하층. 익숙하고 편한 공간인 지하층에 웬일인지 처음 보는 어른들이 가득했다. 그 어른들은 우리나라 말이 아닌 것 같은 낯선 언어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키가 큰 어른들 사이에서 낮은 유모차에 앉은 나는 겁에 질려 소심한 표정이 되었다. 그러다 점점 나를 바라보는 얼굴들이 많아졌고, 그 얼굴들이 모두 나를 위해 제각각의 표정들을 지어주었다. 눈을 크게 뜨고 환하게 웃는 표정, 피카부를 해주며 짓는 장난꾸러기 같은 표정, 미간을 살짝 모으고 입술을 내밀어 달래주려는 표정. 나는 그 표정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기에 곧 편안함을 되찾았고 보답으로 미소를 날려드렸다. 그런 나를 보고 어른들의 표정이 더 밝아졌다.


그 어른 사람들은 태국의 한 대학에서 느티나무 도서관을 견학하러 온 분들이었다. 만약 나에게 도서관에 대해 설명할 기회가 주어졌다면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안녕하세요. 이곳은 제가 아끼는 도서관입니다. 저는 일주일에 두 세 번 이곳에 방문합니다. 주로 어린이들과 아기들을 위한 공간인 지하에 머무르는데요. 제가 이곳에서 가장 자주 하는 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함께 사진을 보시죠. 서가 사이사이 돌아다니며 그림책 뽑기-아직 걷지 못하기 때문에 보행기를 이용합니다-, 블럭 가지고 놀기, 치즈나 바나나 같은 간식 먹기, 작가와의 만남 같은 포럼에 한 자리 차지하고 앉아 있기, 엄마의 낭독회 구경하기.


제가 꼭 하고 싶지만 아직 하지 못하고 있는 것들도 많습니다. 지하로 올 때 미끄럼틀을 타고 내려오는 것을, 골방에 틀어박혀 만화책을 완결까지 한 번에 읽는 것을, 책을 함께 읽을 친구들과 모여 낭독회를 여는 것을, 옥상 텃밭에 제가 가장 좋아하는 수박을 심어보는 것을. 이것들을 할 수 있게 될 날이 곧 오겠지요.


그럼 느티나무에서 좋은 것들 많이 가져가시길 바랍니다.


부상

나, 세상에 나온지 298일



그러고 보니 나는 큰 부상을 당해본 적이 없구나. 앉아 있다가, 일어나려다가 넘어져서 머리를 바닥에 부딪힌 적은 몇 번 있지만, 멍이나 혹 같은 것은 생기지 않았었다. 매달리고, 기어 오르고, 무작정 떨어지고 보는 익스트림 라이프를 즐기는 것 치고는 운이 꽤 좋았다. 오늘 아침까지는.


부상은 예기치 않은 곳에서 찾아온다. 별로 위험해 보이지 않는 때에 잠깐 경계를 풀면 상처가 생기나보다. 첫 번째 부상은 엄마가 할머니에게 걸려온 전화를 받기 위해 방에서 나갈 때 생겼다. 엄마를 따라 나가려다 문틈에 발가락이 끼었다. 새끼발가락 피부가 조금 까졌고 멍이 들었다. 두 번째 부상은 할머니집에서 생겼다. 식탁 의자를 잡고 일어나려다가 그만 손이 미끄러져 버렸다. 의자 다리의 모서리에 얼굴을 찧었고 내 볼에는 모서리 방향으로 멍이 생겼다. 세 번째 부상은 입 안에 생겼다. 콩콩 뛰다가 혀를 깨물었다. 혓바닥에서 피가 났다.


고통은 오래가진 않았지만 다친 나를 보는 어른들이 너무나 속상해 했다. 내 몸을 더 정밀하고 견고하게 쓸 수 있는 날이 어서 왔으면 좋겠다.


슬픈 것과 다행인 것

나, 세상에 나온지 299일



엄마는 초등학생일 때 시험 점수를 잘 받기 위해 전직 대통령들의 이름을 열심히 외웠다고 한다. 엄마가 태어난 1987년과, 그로부터 10년 전의 대통령 둘은 임기를 끝내고 나서도 굳이 다시 대통령이 되어서 외워야 할 이름들이 줄어든다고, 좋아했었던 것 같다고도 했다.


어릴 적에 배운 것들이 뭔가 잘못된 것 같다고 어렴풋이 말할 수 있게 되었을 때는 이미 엄마가 성인이 되고 난 후였다. 그 때 대통령이었던 이는 과거의 인물들과 많이 달랐다고 한다. 사람들 앞에서 그것은 나쁘다고, 화가 난다고, 미안하다고 말할 줄 아는 사람이었댔다. 운이 좋게도 십대의 후반과 이십대의 초반에 그런 이를 대통령으로 두어서 그나마 부끄러움을 아는 성인이 되었는지도 모르겠다고 했다.


언젠가 너도 과거의 대통령들을 배우게 되겠지, 너의 세대가 배울 전직 대통령들은 엄마의 시절보다는 그 면면이 더욱 다양할 거라고, 그리고 그 평균치도 더 나아져 있을 거라고. 그것은 그나마 조금씩 네가 사는 세상이 나아지고 있다는 증거가 아니겠냐고 말하는 엄마가 조금 슬퍼 보였다.


열두시가 넘도록 아직 들어오지 않고 있는 아빠 때문인지 아닌지. 잘 모르겠다.


300

나, 세상에 나온지 300일


저녁을 먹으며 엄마는 아빠에게 오늘 훈기 300일이야,라고 말했다. 아빠는 나를 보며 스파르타!라고 외쳤다.


아빠와 엄마의 얼굴이 점차 초췌해지고 있다. 밤 늦은 시간의 나의 부모의 모습은 스파르타의 군인들이 훈련을 마친 후의 모습과 다를 바가 없다. 내 방을 만들어 나를 따로 재우면 안방에서 둘이 재미있는 것을 많이 할 거라고 기대했다는데, 기대는 기대에서 끝나는 경우가 허다하다.


100일 즈음 나는 분유만 먹었고 누워서 발차기를 했다. 200일 즈음 나는 이유식을 먹었고 뒤집을 수 있었다.


300일이 된 요즈음 나는 밥을 먹고 소파에 올라간다. 여전히 걸음마보조기의 나사를 풀지만, 잡고 걸음마를 하기도 한다. 공기청정기를 잡고 서서 놀 때-이제 공기청정기 따위 무섭지 않다- 아빠가 나 대신 버튼을 누르려 하면 그의 손을 살포시 밀어낸다. 엄마 무릎에 앉아 피아노를 칠 때 내 건반 위에 엄마 손이 올라와도 살포시 치운다.


좋음과 싫음이라는 두 감정에서 확실하게 이름을 붙이기 어려운 감정들이 분화되고 있다. 엄마에게 안 돼,라는 말을 들었을 때의 마음, 치즈를 눈 깜짝할 사이에 다 먹어버렸을 때의 마음, 아빠가 퇴근하며 현관 비밀번호를 누르는 소리가 들릴 때의 마음, 분유를 먹고 늘어지는 나른한 오후의 마음, 엄마에게 안겨 엄마 냄새를 맡을 때의 마음 같은 것들.


내가 태어난 계절이 지구 한 바퀴를 돌아 다시 여기에 도착해 있다. 나는 점점 다양해지고, 치밀해지고, 복잡해지고, 충만해진다. 나를 설명하기 위해 필요한 이야기가 점점 길어지고 있다.

부기. \][=\\] (대필 없이 내가 직접 써봄)



#아기관점육아일기 #훈기일기


https://www.instagram.com/babyhoong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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