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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주차 | 혼자 먹는 밥도 있다

by 참깨

혼자 먹는 밥도 있다

나, 세상에 나온지 291일



카페나 식당에 가면 나는 주위 사람들을 관찰하기를 좋아한다. 테이블에 놓인 음식이나 음료는 비슷비슷해도 사람들은 모두 제각각으로 생겼다. 옆 테이블의 손님들을, 서빙하는 노동자를 나는 오래도록 관찰한다. 한참을 쳐다보면 보통 그들은 ‘쟤 좀 봐’하며 나를 가리키고 눈을 맞춰준다. 그 때가 웃어야 하는 타이밍이다. 내가 눈을 한껏 작게 만들며 미소 지으면 대개 상대방도 나를 보고 웃어 준다. 서빙해주시는 분들도 마찬가지이다. 바쁘게 테이블을 오가는 모습을 눈으로 좇으며 신호를 보내면 내가 떠나기 전에 꼭 한 번 내 얼굴을 들여다 보아 준다.


어쩌다 보니 오늘도 외식을 하게 되었다. 어제 도토리묵 식당에서는 내가 소리를 질러대는 바람에 나의 어른들이 여러 번 대신 사과해야 했다. 그 모습을 보고 나는 오늘만큼은 예의 바른 아기가 되기로 결심했다. 목소리를 줄이고 주위를 살폈다. 나의 왼쪽 테이블에 손님이 있어서 그쪽을 먼저 공략했다. 대상은 교복을 입은 중학생 형아. 형아는 테이블에 세워 둔 스마트폰을 보며 돈까스를 먹고 있었다. 혼자였다. 아마 학원이 끝나고 저녁을 먹고 있는 것 같았다. 부모님이 모두 직장에 다니시나보다. 나는 한참을 형아를 쳐다보며 엄마가 싸온 명란새우두부국밥을 받아 먹었다. 형아가 계속 스마트폰만 본다. 나는 고개를 40도 정도 기울이고 검지손가락을 입에 물고 이쁜짓 포즈로 형아를 바라봤다. 형아는 젓가락을 느리게 움직이며 여전히 스마트폰 영상만 본다.


형아 공략이 실패하는 동안 나의 오른쪽 테이블에 새로운 손님이 착석했다. 이번에는 연세가 많으신 할아버지였다. 허리가 조금 굽었고 다리가 불편하신지 지팡이를 짚고 들어오셨다. 멋진 페도라를 쓰고 계셨다. 할아버지는 모밀면을 주문하셨다. 모밀면은 요리가 쉬워서인지 금방 차려졌고, 나는 젓가락질을 시작하신 할아버지를 공략하기 시작했다. 할아버지 역시 혼자였다. 지팡이를 짚고 느리게 걷던 할아버지였지만 젓가락질은 정말 빨랐다. 내가 나의 전략 무기인 이쁜짓 포즈를 하기도 전에 할아버지는 후루룩 식사를 마쳤다. 그리고는 일어나서 지팡이를 짚고 천천히 걸어 나가셨다. 나에게는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엄마는 아빠에게 형아와 할아버지 이야기를 했다. 양 옆 테이블에 남자 청소년과 남자 노인이 각각 혼밥을 하고 있었던 것이 흥미로웠나보다. 아빠는 같이 밥을 먹었지만 두 혼밥러의 존재를 전혀 모른다. 아빠는 그런 사람이다. 이모는 (이모가 놀러왔다) 자기는 중학생 때 혼자 밥 먹을 생각같은 건 하지도 못했다고 말했고, 엄마는 요새 그런 학생들이 꽤 많지 않을까,라고 답했다. 아빠는 자기는 혼밥이 별로라고 했고, 엄마는 요즘따라 혼밥이 더 그립다고 했다. 나는 아직 혼밥을 해본 적이 없다.


그럴 만한 사치

나, 세상에 나온지 292일



우리 가족은 많은 물건을 가지고 있지는 않다. 쇼핑에 별로 관심이 없는 아빠와 그런 아빠와 살며 쇼핑을 점점 귀찮아하고 있는 엄마가 균등하게 경제권을 쥐고 있기 때문이다. 나에게는 아직 소비에 대한 욕망이 없다. 아빠와 엄마는 나의 욕망을 짐작해서 가끔 나를 위한 물건을 사주곤 한다. 여기서 가끔이란, 아주 정말, 진실된 가끔에 가깝다.


반면 우리는 같은 용도의 물건을 세 개나 소유하는 사치를 부리고 있기도 하다. 거실에 한 개, 현관에 한 개, 자동차 트렁크에 한 개가 있다. 유모차다. 나는 유모차 세 대의 소유주다. 거실에 있는 것은 아빠의 지인에게 물려받은 것인데 나는 그 유모차에 누우면 잠을 잘 잤다. 그래서 내가 잠투정을 할 때면 그 유모차가 출동했다. 그러다가 유모차에서 일어나 뛰어 내리려 했던 적이 한 번 있는데, 그 이후로 거실 유모차는 나의 바퀴굴리기 놀이용이 되어버렸다. 현관에 있는 유모차는 엄마가 중고로 산 것이다. 마트에 갈 때, 느티나무 도서관에 갈 때, 동네 산책을 할 때 나는 그 유모차를 탄다. 마지막 한 대는 휴대용 유모차다. 중고나라에 올라온 새 유모차를 엄마가 덥썩 싼 가격에 물었다. 접을 수 있는 이 유모차는 자동차 트렁크에 실려 있다.


점심을 먹고 나면 잠이 오는데 나는 이 아까운 오후 시간을 잠으로 날려버리고 싶지 않다. 최대한 깨어 있으려 노력하는데 잠은 계속 쏟아지니 나는 엄마에게 안아달라고 사정을 하는 것이다. 엄마는 그런 나를 견디기 힘들어 한다. 차라리 바깥에서 우리는 더욱 편안하다. 나른하고 잠이 오는 오후가 되면 나는 유모차를 타고 멀지 않은 곳으로 나간다.


엄마와 이모와 셋이 오후에 백화점에 갔다. 미세먼지가 좋지 않았고 수족구와 독감이 여전히 유행이라 갈 수 있는 곳이 많지 않았다. 전철역과 연결되어 있는 백화점에는 사람이 아주 많았다. 내 옆을 휙휙 지나쳐가는 사람들 하나하나에게 눈길을 보냈고 그 눈길에 응답하는 사람도 몇 명 있었다. 화장품 가게와 옷 가게에 들어가보았고 엘리베이터를 몇 번 탔다. 잠이 너무 와서 울고 싶었지만 바닥부터 천장까지 반짝이는 것들로 가득 찬 백화점에는 구경할 것이 너무 많아서 울 새가 없었다.


그러다가 잠이 들었나보다. 푹 자고 일어났는데 여전히 백화점이다. 엄마와 이모는 커피를 한 잔씩 손에 들고 있었다. 이럴 때에는 유모차를 세 대씩이나 소유하고 있는 사치가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 것 같다.


매일의 리듬

나, 세상에 나온지 293일



아빠는 궁금한 것을 참지 못하는, 호기심 대마왕이다. 새로운 것을 접하면 오픈형 백과사전에서 무조건 검색을 하고, 흥미로운 메뉴를 다루는 음식점 앞을 지날 때면 꼭 한 번 들어가본다. 이미 식사를 했더라도 말이다. 들어가서는 ‘나중에 꼭 와보고 싶어 그러는데, 메뉴판을 한 번 볼 수 있을까요?’라고 묻는다. 낯선 장소에 가면 그곳에 있는 모든 골목을 한 번은 밟아보아야 직성이 풀리는, 그런 사람이다.


반면 엄마는 익숙한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다. 길을 찾는 데에 집중하지 않아도 되는 익숙한 길에서만 공상이나 망상이나, 그런 소소하고 뿌듯한 생각들이 떠오르기 때문이라고 한다. (잘 해결되지 않는 길치력 때문이기도 하다.) 엄마는 좋아하는 곳에 여러 번 가기를 좋아하고, 자꾸 가다 보면 그곳과 닮은 사람이 된다고 생각한다. 여행지를 고를 때에도 저번에 좋았던 그 곳, 무엇을 먹을지 고를 때도 지난 번에 먹었던 맛있는 그것을 또 먹자고 한다.


엄마와 아빠는 호주로 신혼여행을 갔었는데 아빠 스타일로 쏘다니다가 여행 막바지에 엄마의 종아리에 탈이 났었다고 한다. 아빠는 엄마를 많이 배려한 동선이었다고 말하지만 말이다.


같이 다닌 길의 길이가 길어지며 둘은 자연스럽게 서로의 스타일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언제나 같은 길을, 함께 걸어야 한다는 생각을 버리니 편해졌다고 한다. 여행을 가거나 산책을 가면 아빠는 엄마를 그녀가 오래 머무르고 싶어 하는 곳에 두고, 그 근처를 빠른 걸음으로 탐험하다 돌아온다. 보통 엄마가 자리를 뜨고 싶을 때쯤 아빠가 돌아오고 둘은 다시 함께 길을 나선다.


내가 이 가족에 합류하고부터 나는 엄마와 머무르기도 하고, 아빠와 탐험하기도 한다. 머무를 때 나는 사람들의 대화를 엿듣기도 하고, 그림자가 길어지는 모습을 보기도 하고, 먹고 쉬며 이런저런 생각들을 한다. 탐험할 때 나는 아빠에게 안겨서 길을 찾는 감각 같은 것을 미리 익히기도 하고, 길이 끝나는 곳을 목격하기도 하고, 엄마에게 알려주고 싶은 새로운 스폿을 발견하기도 한다.


사실 나에게는 머무르는 경험도, 탐험하는 경험도 거의가 처음인 것들이다. 혹시 처음이 아니더라도, 나는 처음과 미묘하게 달라져 있는 것들을 보며 다시 처음 같다고 느낀다.


엄마와 아빠에게 번갈아 안겨서 제각각의 속도와 길이로 세상을 만나다 보면 어느새, 오늘의 리듬이 만들어져 있곤 한다.


모태 곰돌이

나, 세상에 나온지 294일



우리 집에는 아예 티비가 없지만, 할머니 댁에는 수백 개의 채널이 나오는 티비가 있다. 저녁 시간이 되자 아빠는 리모콘을 들었다. 여러 채널을 전전하다 결국 멈춘 채널에서는 야구 중계를 하고 있다. 오늘의 경기는 두산vsSK. 작년도 프로야구 한국시리즈 마지막 경기와 똑같은 매치업이다.


2018년 11월 12일은 한국시리즈 6차전이 열리는 날이자 아빠의 생일 하루 전날이었다. 아빠는 나를 안고 티비를 보면서 두산의 한국시리즈 우승을 생일 선물로 받을 수 있기를 염원하고 있었다. 두산이 한 점 차로 앞선 가운데 SK의 9회 초 정규 이닝 마지막 공격. 두산은 경기를 끝내기 위해 에이스를 구원 투수로 투입했고, 그는 기대대로 첫 두 타자를 범타처리 하면서 시리즈는 7차전으로 넘어가는듯 했다. 하지만 아웃카운트 한 개가 남은 상황에서 마지막 SK의 타자가 동점 솔로 홈런을 치면서 경기는 연장으로 향했다. 아빠는 나를 안고 경기를 봤는데 자리에 앉지도 못하고 내내 거실을 서성이고 있었다.


길고 긴 연장의 끝에 한국시리즈 우승은 SK의 차지가 되고 말았다. 아빠는 낙담했고, 다음날 아침 생일상을 받은 그는 밥도 제대로 먹지 못했다고 한다.


그후로 아빠는 야구에 관심을 끊고 사는 것처럼 보였다. 매일 체크하는 야구 기사도 더 이상 읽지 않았다. 새 시즌이 시작한지 꽤 오래 지났지만 시큰둥해 보였다. 하지만 30년 넘게 보아 온 베어스의 야구를 완전히 끊을 수는 없었는지 그는 두산 야구 중계방송 채널에서 리모콘 조작을 멈추었다. 오늘도 경기는 연장전. 다행히 두산이 승리를 거뒀다. 아빠는 당연히 이겨야 하는 경기를 이겼다는 듯 씩 웃을 뿐이었다. 하지만 하이라이트 방송까지 챙겨보는 것을 보면 꽤나 기뻤나보다.


나에게 모태 신앙같은 것은 없지만, 모태 야구팀은 있다고 봐도 좋을 것 같다.


소가 되더라도

나, 세상에 나온지 295일


내가 엄마 뱃속에 있을 때 엄마는 밥을 먹고 자주 누웠다. 엄마가 밥을 먹으면 내 방에서는 꾸루룩 꾹꾹 요란한 소리가 나곤 했는데 그 이후에는 어김없이 침대에 눕는 것이다. 그러면 나는 꾸루룩 꾹꾹 소리를 들으며 엄마 배를 발로 차고 신나게 놀았다.


엄마가 임신을 했기 때문에 몸이 힘들어 식사 후 바로 눕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엄마는 그냥 음식으로 부른 배를 안고 침대에 눕는 걸 좋아한다. 주말 오전에 늦잠을 자고 일어나 아침을 먹고 누우면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다고 한다.


아빠가 테니스 클럽에 나가는 일요일, 우리는 둘이서 오붓하게 아침을 맞는다. 오늘은 내가 늦잠을 자서 엄마도 늦잠을 잤다. 나는 분유를 먹고 엄마는 시리얼을 먹었다. 엄마는 나에게 먹고 나서 뒹굴거릴 때의 기쁨에 대해 이야기했다. 배도 부르지, 이불은 포근하지, 눈을 떠도 되고 감아도 되는 그 순간, 잠이 다시 들락말락한 그 순간이 아주 좋다고 했다. 옛날 어른들이 먹고 바로 누우면 소가 된다고 아이들에게 겁을 줬던 것은 그것이 너무나도 좋다는 것을 자신들은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라고도 했다. 그리고는 나에게 엄마를 따라 뒹굴거려 보라고 했다.


나는 엄마 옆에 누워 다시 이불을 덮고 도기의 꼬리를 잘근잘근 씹었다. 입 안에 아직 남은 분유의 달콤함을 머금은 채 몸 어디에도 힘을 주지 않아 이완되는 느낌이 아주 편안했다. 엄마가 발을 주물러 주었고 나는 도기도 내려놓고 온 몸을 가만히 내버려 둔 채 천장을 바라봤다. 천장이 깜빡 사라졌다 깜빡 나타났다.


소가 되더라도 이 기분을 포기하기는 쉽지 않을 것 같다.



#아기관점육아일기 #훈기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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