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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주차 | 어버이를 위하여

by 참깨

어버이를 위하여

나, 세상에 나온지 284일


우리집에 엄마의 엄마의 엄마가 오신 줄 알았다. 나의 외증조모는 허리가 많이 아파 똑바로 걷지 못하시는데 누군가가 그와 똑같은 자세로 집안을 걸어다닌다. 나의 엄마다. 엄마는 어제부터 갑자기 허리가 아프다.


아픈 사람에게는 도움이 필요하다. 아빠는 퇴근하고 돌아와서 엄마 대신 어른 그릇들과 내 젖병을 씻었다. 나를 안아 재워주기도 했다.


나는 무엇을 도와줄 수 있을까 생각하다가 혼자서 오랫동안 잘 놀아보기로 했다. 나는 엄마에게 놀아달라고 하는 대신 집안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며 혼자 시간을 보내려고 했다. 아닌게아니라 집에는 재미있는 것이 아주 많아서 어른들에게 놀자고 사정할 필요가 별로 없다. 오지를 누비는 베어 그릴스처럼 나는 집안 곳곳에서 익스트림을 즐긴다. 식탁 밑에 들어가 에어프라이어의 전선을 씹는다. 빨래건조기의 동그란 문에 매달려 전원버튼을 눌러댄다. 화장실에 들어가 바닥에 붙어있는 젖은 머리카락들을 손으로 휘젓는다. 피아노를 잡고 일어나 열쇠구멍에 손가락을 넣고 후빈다.


이 모든 것들이 얼마나 재미있는지 시간 가는 줄 모른다. 제때 잘 먹여만 주면 나는 혼자서 하루종일 놀 수도 있을 것만 같다. 내가 이렇게 혼자 놀 때 엄마는 누워서 휴식을 취하면 되는데, 엄마 생각해서 그러는 건데, 엄마는 자꾸만 나를 따라온다. 나는 전력을 다해 기어서 엄마를 떼어놓으려 하고 엄마는 꼬부랑 허리를 하고는 전력을 다해 쫓아온다.


엄마가 걱정된다.


더러움 주의

나, 세상에 나온지 285일



어디서 만두 냄새가 난다고, 엄마가 말했다.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내 똥인데. 점심에 만두를 먹었더니 만두 냄새가 나는 똥을 쌌다.


신생아일 때 내 별명은 나는 영국 수상을 닮았다고 윈스턴이었다. 윈스턴 시기를 끝낸 후 나는 꽤 오랫동안 이쁜이로 불리다가 지금은 똥쟁으로 불리고 있다. 안똥쟁.


똥을 자주 싸니 똥꼬가 헐어서 약을 발라도 계속 빨갛다. 아기일 때는 분유를 먹는 싸이클로 하루가 돌아갔다면, 요즘은 똥 싸이클로 하루를 나눌 수 있다. 아침똥과 밤똥은 고정이다. 아침 먹고 한 번을 싸야 하루를 가뿐하게 시작할 수 있고 자기 전에 또 한 번을 싸야 편안하게 잠들 수 있다. 점심똥과 저녁똥은 간헐적이다. 많이 먹은 날에는 식후 세 번과 자기 전 한 번, 총 네 번을 싸기도 한다. 똥을 몇 번 싸냐는 질문을 받으면 엄마는 평균 세 번이라고 답한다.


하루에 평균 세 번 내 엉덩이는 물로 닦아 깨끗해진다. 엄마와 아빠의 스타일이 다르다. 아직은 나를 무거워하지 않는 아빠는 옛날 스타일을 고수한다. 반면 엄마는 내가 잡고 설 수 있게 되자마자 방법을 바꾸었다. 나는 욕조를 잡고 서 있고 엄마는 샤워호스에서 나오는 물로 나를 씻긴다. 한 손에는 샤워헤드를 들고, 남은 한 손으로 내 엉덩이 구석구석을 비빈다. 손을 내 엉덩이에 대기 전에 엄마는 먼저 내 엉덩이에 따뜻한 물을 오래도록 뿌린다. 똥을 손에 최대한 덜 묻히겠다는 굳은 의지가 느껴지는 장면이다. 욕조의 수챗구멍으로 빨려들어가는 당근조각과 버섯줄기와 토마토 껍질 같은 것들을 보며 나는 내가 먹은 것들을 복기한다.


다양한 음식들을 먹고 있고 그것들의 허물을 내보낸다. 내보내지 않은 영양분으로 내가 자란다.


냉장고 파먹기

나, 세상에 나온지 286일



한잠 자고 일어났더니 엄마가 점심을 먹으라며 부른다. 점심으로 엄마가 주는 음식은 밥이 아니라 이유식이다. 시판 이유식을 사두었던 것이 남았다고 그것을 먹으라는 것이다. 이유식을 끊은지 한 달도 훨씬 넘었는데 다시 이유식을 먹으라니 황당했다. 엄마는 허리가 아파서 반찬이랑 국을 만들지 못했다며 미안하다고 했다. 그래도 나는 이유식은 싫다. 입을 닫았다. 엄마가 냉장고에서 치즈를 꺼내와 유혹한다. 이유식을 한 숟가락 뜨고 그 위에 치즈를 한조각 얹어 준다. 나는 치즈는 먹고 싶지만 이유식은 먹고싶지 않다. 입으로 들어오는 숟가락을 손으로 움켜잡고 다른 손으로 치즈를 집었다. 엄마는 깔깔 웃었고, 이유식 먹이기를 바로 포기했다.


엄마는 내 밥그릇을 꺼내 들고는 밥솥으로 갔다. 내 밥그릇에는 따뜻한 흰 쌀밥이 담겨 왔다. 거기에 치즈와 참기름과 김가루가 더해졌다. 치즈 참기름 비빔밥이다. 적당히 녹은 치즈가 밥알 사이에 스며들어 있었고 참기름이 밥과 치즈를 매끈하게 코팅했다. 거기에 김가루라니. 치즈김밥이 바로 이런 맛이 아닐까. 가끔은 냉장고를 털어 만든 간단한 식사가 입맛을 더욱 돋울 때가 있다.


아기 상어

나, 세상에 나온지 287일



세상에 나온지 100일 무렵까지 나는 붉고 무른 잇몸을 가지고 있었다. 엄마는 손수건에 물을 묻혀 손가락에 씌우고 내 잇몸 구석구석을 닦아주곤 했다. 닦을만큼 다 닦고 나서도 엄마는 한참을 손가락을 빼지 않고 기다린다. 그러면 나는 무른 잇몸으로 그 손가락을 힘껏 깨물었다. 엄마는 간지럽다며 또 깨물어달라고 했다. 태어난지 정확히 116일이 되던 날 엄마와 아빠는 아래 잇몸에 돋은 나의 첫니를 발견했다. 그리고는 오마이갓, 세상에,와 같은 감탄사들을 내뱉었다. 그 즈음부터 엄마는 손수건으로 싼 손가락 대신 실리콘 칫솔로 내 이를 닦아준다. 내가 젖병을 물어 뜯을 때마다 등골이 서늘해진다며 함부로 내 입 안에 손가락을 집어넣지 않는다.


이제 내 잇몸에는 여덟 개의 이가 돋아 있다. 그 이들로 밥도 먹고 떡도 먹고 고기도 먹는다. 거실장을 잡고 일어서 까치발을 할 때 손 힘이 부족하면 윗니를 거실장 모서리에 박아 힘을 보태기도 한다. 엄마에게 폭 안겨 있다가 나도 모르게 엄마의 어깨를 깨물어서 우리는 함께 울기도 했다. 아빠의 팔뚝에도 내 잇자국이 선명한 날이 많다. 나는 이 구역의 죠스다.


요새 나는 이를 간다. 나도 모르게 윗니와 아랫니를 강하게 마찰시켜 부비는데 그러면 부드득 부드득 소리가 난다. 간지러워서이기도 하고, 그냥 재미로 하는 것이기도 하다. 엄마는 그러다가 나의 소중한 이들이 모래처럼 알알이 부서져버리면 어떡하냐고 나를 말린다. 아빠는 그러다 말겠지,라고 반응하지만 엄마의 계속되는 걱정에 치과의사인 친구에게 물어보겠다고 대꾸한다. 아직까지 물어보지는 않고 있다.


검색어: 아기 코디, 정렬: 최신순

나, 세상에 나온지 288일


서늘하고 그늘져있는 집에만 있다 보면 바깥 날씨를 가늠하기 어렵다. 여름이 오고 있다는데, 나의 홈웨어는 여전히 긴팔 상하의와 조끼이다. 1층에다가, 거실창 바로 앞이 높은 나무들로 막혀있는 우리집은 항상 그늘져 있다. 그래서 혹독하게 추운 겨울을 보냈다. 추위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겨울에 자주 아팠던 나를 위해 우리집은 여전히 난방에 신경을 많이 쓴다.


점심을 먹기 위해 해가 중천에 떠있는 시간에 유모차를 타고 나갔다. 엄마는 긴팔 상의 두 겹과 긴바지 한 겹을 코디했고, 아빠가 그대로 입혀주었다. 그늘에서는 괜찮았지만 그늘이 없는 곳에서는 꽤나 더웠다. 식당으로 오고 가는 길에 나의 부모는 옷을 한 겹 벗길까, 말까 하며 계속 고민했다. ‘덥긴 더운데 훈기는 걷지 않고 가만히 앉아 있으니까 별로 안 더운 거 아닐까’, ‘식당에 들어가면 춥지 않을까’하는 말들을 주고받았다. 그러다가 결국 양말 두짝만 벗겨 주었다.


집에 오는 길에 마트에 들러 장을 보았다. 해산물과 육류, 신선식품들이 노출되어 진열되어 있는 마트는 꽤 서늘하게 유지되고 있었다. 엄마와 아빠는 그것보라며, 옷을 벗겼으면 마트에서 춥지 않았겠느냐며 자신들의 선택을 정당화했다.



다가오는 기쁨

나, 세상에 나온지 289일


작년 이맘 때 내가 있던 곳이 너무 좁아지는 바람에 나는 자주 발버둥을 쳤다. 사실 좁아지지 않았고 오히려 넓어지고 있었는데 내가 자라는 속도가 훨씬 빨라서 나는 몸을 더 웅크려야만 했다. 빛을 감지할 수 있게 되면서 밤이 길게 느껴졌다. 귀가 밝아지며 낯선 소리가 들릴 때마다 엄마의 자궁에 귀를 바짝 갖다댔다. 지금 쁨이도 내가 겪은 것들을 하나하나 겪으며 궁금해하고 있을 것이다. 도대체 바깥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지? 누구와 이야기를 하고, 무엇을 먹고, 무엇을 보고 있는 거지? 이 따뜻한 느낌은 뭐지?


쁨이는 엄마가 아끼는 친구의 아가이다. 우리 넷은 공원에서 만나 소풍을 했다. 우리는 함께 걸었고, 나는 잠시 잠이 들었다. 그 사이 매트 위에는 맛있는 음식들이 펼쳐져 있었다. 고구마와 빵을 먹으면서 쁨이도 얼른 이 맛을 보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옆자리에서 소리지르는 아가를, 비행기 날리는 형아를, 데이트하는 커플을, 운동 나온 노인들을 구경하는 것이 얼마나 재미있는지 쁨이도 알게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내가 당장 말을 할 수 있다면 곁에 모여드는 비둘기와 참새와 강아지와 고양이들에게도 말해주고 싶었다. 쁨이가 여기에 있다고.


식물들의 색깔이 건강해지고 있다. 살아있는 것들을 충만한 에너지로 가장 크게 키워 낼 계절에 쁨이는 태어날 것이다. 그리고 그 기운은 쁨이도 무럭무럭 자라게 할 것이다.


죄송합니다

나, 세상에 나온지 290일



나는 아가이기 때문에 아직 스스로 할 수 없는 것들이 많다. 꼭 필요하지만 아직 내가 스스로 할 수 없는 여러 것들을 나를 아끼는 어른들이 대신 해준다. 작은 크기로 자른 음식을 입에 넣어주고, 더러워진 손을 흐르는 물 아래에서 비벼 씻어주고, 단추를 잠궈주고, 고추를 말리고 기저귀를 채워주고, 손이 닿지 않는 곳에 있는 것을 내려주고, 일기도 써주고. 대신해줌 리스트는 아주 아주 길다.


여기에 ‘사과해주기’가 추가되며 대신해줌 리스트가 업데이트되었다. 식당에서 나는 아주 큰 소리를 여러 번 냈고, 삼촌과 엄마가 옆 테이블에 있던 손님들에게 대신 사과를 했다. ‘죄송합니다’라고.


할머니, 할아버지, 삼촌이 오셔서 집 근처 우리가 자주 가는 식당에서 식사를 하게 되었다. 나는 미리 점심을 배부르게 먹고 갔고 그 사실이 어른들을 소홀하게 만들었다. 아무리 배가 불러도 코앞에 맛있는 음식들이 있는데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나는 내게도 음식을 달라는 의미로 ‘꺄’, 빨리 입에 넣으라는 의미로 ‘꺅’, 똑같은 것만 계속 주지 말라는 의미로 ‘꺄꺄’라고 말했다. 작게 말하면 그냥 옹알이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큰 소리를 냈다.


식당에는 우리 말고 한 팀이 더 있었다. 한산한 식당의 네 벽에 내 목소리가 반사되어 더 크게 울렸다. 내가 여러 번 소리를 지르자 결국 삼촌이 옆 테이블 손님들에게 ‘죄송합니다’라고 말했고, 다시 소리를 지르자 이번에는 엄마가 난처한 표정으로 사과했다. 사과를 받은 남자어른과 여자어른은 애가 그러는 게 당연하다며 내가 귀엽다고 해주셨다. 그래서 소리를 더 질러도 되겠구나,라고 생각했는데 소리를 내려 입을 벌릴 때마다 엄마와 할머니가 번갈아가며 묵과 호박과 새우와 들깨죽을 쉼없이 넣어줘서 소리지를 일이 별로 없게되었다. 옆 테이블의 손님들이 먼저 일어나며 내게 잘 먹어서 예쁘다고 덕담을 해주셨다. 칭찬받아 기분이 좋아 눈웃음을 보여드렸다.


항상 어른이 대신 사과를 해 줄 수는 없다고, 엄마는 집에 돌아와서 말했다. 다른 것들처럼 사과도 언젠가 스스로 해야 한다고. 사과할 일을 만들지 않는 것이 가장 좋지만, 그건 어른들도 쉽지 않은 일이니 사과를 잘 하는 방법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다. 아이의 행동 중 얼마만큼이 부모탓인지는 아무도 확실히 말할 수는 없지만, 절대 부모탓을 할 수 없는 때가 온다는 것은 확실히 말할 수 있다고. 눈웃음으로 그냥 넘어갈 수 있는 시기는 얼마 남지 않았을 수도 있다고.




#아기관점육아일기 #훈기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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