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세상에 나온지 278일
‘개가 죽었어’라고 소리치는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우리는 아침을 먹던 숟가락을 멈추고 갑작스러운 소란에 귀 기울일 수밖에 없었다. 누군지 모를 남자의 외침과 동시에 ‘으악’하는 비명이 들렸다. 우리에게 친절한 얼굴로 곰탕과 덮밥을 가져다 주었던 식당 주인아주머니의 목소리였다.
엄마는 아빠에게 ‘나 그 개 봤어’라고 작게 말했다. 주차장에 묶여 있던 까맣고 작은 그 개, 아직 어린 강아지임이 분명한 그 개를, 식당에 들어오던 길에 나도 보았다. 소란은 계속되었다. 남자의 목소리가 줄에 목이 감겨 숨이 끊아졌나보다고 말했고, 주인아주머니는 빨리 치우라고, 보이지 않게 비닐에 싸서 당장 치우라고 소리쳤다. 엄마는 숟가락을 내려 놓았다. 아빠가 더 먹지 않느냐고 물었다. 애초에 맛이 없어 많이 먹을 생각도 없었다고 엄마가 답했다.
소란은 믿을 수 없이 빨리 잦아들었다. 죽은 개를 ‘치우는’ 일은 청소처럼 신속하게 이루어졌다. 그리고 주인아주머니는 다시 친절한 얼굴을 하고 우리에게 음식은 맛있었냐며, 나중에 또 오라는 덕담을 건넸다. 그때만큼은 우리에게 덜 친절했더라도 괜찮았을텐데.
그 죽음이 우리에게 해가 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우리는 여행의 마지막 날 오전을 조금 침울하게 보냈을 뿐이다. 그 강아지에게도 엄마, 아빠가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을 오후에 몇 번 떠올리며 잠깐씩 쓸쓸해졌을 뿐이다.
나, 세상에 나온지 279일
요새 엄마는 자꾸 ‘옛날이 좋았어’라고 말한다. 내가 아무 물건이나 잡고 일어나기 때문인 것 같다. 나의 기립 역사는 소파에서부터 시작했다. 나는 맨 처음에 소파를 잡고 일어났고, 한동안 소파만 잡고 일어났다. 소파는 푹신푹신해서 부딪혀도 아프지 않고 아래에는 매트가 깔려 있어 넘어져도 다치지 않는다. 그런데 요새 소파는 조금 시시해졌다. (소파는 이제 잡고 일어서기보다는 기어 올라 타는 맛으로 가지고 논다.) 나는 집 안의 잡고 일어날 수 있는 다른 물건들을 찾아 다닌다. 공기청정기를 잡고 일어나고, 식탁 의자를, 피아노 의자를, 쏘서를, 거실장을, 빨래건조대를, 기저귀가 쌓여 있는 트롤리를 잡고 일어난다. 그러면 엄마는 어쩔 수 없이 내 뒤에 와서 딱 붙어 있어야 한다. 아니면 내 겨드랑이에 손을 넣어 나를 들고 안전한 곳으로 옮겨야 한다. 나는 이제 제법 무거워져서 엄마는 자꾸 여기저기가 아프다고 한다.
잡고 일어났다가, 사뿐히 앉았다가, 다시 일어날 때의 성취감이 아주 크다. 일어나서 높은 곳까지 손을 뻗었을 때 나는 내가 더 이상 아기가 아니라 어린이가 된 것처럼 느껴진다. 높은 곳에 손을 뻗어 트롤리 3층에 있는 기저귀를 꺼냈을 때, 건조기 전원을 켰을 때, 피아노 건반을 눌렀을 때 이제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더욱 많아졌다는 것을 실감한다.
아까 부엌장을 잡고 일어나다가 우연히 서랍을 열었다. 후다닥 엄마가 달려와 그 무겁다던 나를 번쩍 안고는 황급히 부엌을 빠져 나가며 ‘아이고 하나도 재미 없는 거다’라고 말했다.
우리 집 안에 숨겨진 세계가 있다.
나, 세상에 나온지 280일
아빠의 부모님, 나의 조부모님은 이제 우리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사신다. 서울에서 용인으로 어제 이사하셨는데 새 집에 오늘 우리가 방문했다.
지면과 거의 같은 높이에 있는 1층에 사는 나는 18층에서 펼쳐지는 넓은 시야를 처음 경험했다. 지면은 까마득한 아래에 있었고, 멀리 고속도로와 아파트 단지들과 산이 보였다. 고속도로 위를 달리는 수많은 빠방들은 내 방에 있는 장난감만큼이나 작아 보였다.
엄마, 아빠는 급히 병원에 가야 해서 나는 두 시간 동안 할아버지, 할머니, 그리고 삼촌과 함께 있었다. 엄마, 아빠가 돌아왔을 때 할아버지는 내가 두 시간 동안 어떤 행동을 했는지 낱낱이 일러바치셨다. 여기서 우리 할아버지의 원래 캐릭터를 안다면 조금 더 재미가 있을텐데, 할아버지는 근엄하고 위엄있는 어른 대장 역할을 편안해하시는 분이다. 그런 할아버지가 내가 어떻게 떼를 부렸는지 하나하나 말씀하실 때 나는 고개를 돌리고 조금 웃었다.
일단 나의 상태가 어쩔 수 없기도 했다. 여느 때처럼 나는 자정 무렵에 잠이 들었었다. 문제는 아빠가 테니스 클럽에 가기 전에 아침을 먹는다며 부엌에서 부산스럽게 움직인 것이었는데, 나는 그 소리에 그만 잠이 깨버렸고, 새벽 5시였다. 두 시간 동안 엄마는 나를 다시 재우려 낑낑댔고 나는 7시에 겨우 다시 잠이 들었다. 이번에는 엄마가 할머니댁에 가야 한다며 내 기저귀를 갈며 깨우는 바람에 다시 억지로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보충잠을 세 시간밖에 자지 못한 때였다. 그러니까 나의 수면 시간은 총 여덟시간 밖에 되지 않았고, 그 상태로 할머니댁에 도착했다. 내가 아니라 다른 아가라도 피곤해서 투정을 심하게 했을 것이다.
며칠 전에도 일기에 쓴 것처럼 나는 한 번 잠투정을 하면 제대로 한다. 아니, 한다고 한다. 나는 그 상황을 잘 기억하지 못하는데 엄마, 아빠가 항상 그 이야기를 주고 받기때문에 그것이 나의 기억인 양 또렷이 알고 있다. 허리를 꺾으며 울고, 머리를 이불에 박고 돌아다니고, 아무튼 내가 생각해도 심하다 싶다. 그 장면을 처음 본 할아버지는 너무 놀랐다며 자꾸만 같은 말씀을 반복하셨다. 이녀석이 말이야, 그랬단 말이야. 말이야. 말이야.
가끔 어른들은 아기들의 천사같은 모습만 보고싶어 한다. 하지만 이런 면도 어쩔 수 없는 나의 일부다. 이런 나를 엄마, 아빠는 매일 견디고 있다. 물론 나도 엄마, 아빠의 어떤 면들을 견디며 산다.
나, 세상에 나온지 281일
어린 사람을 어린이라고 하는데 나는 어린이보다 더 어린 작고 작은 사람이다. 오늘은 어린이의 날이라는데 미래의 어린이인 나도 기분을 내 보았다. 매일을 힘껏 즐겁게 보내야 하는 어린이와 더어린이의 유일한 의무에 걸맞게 오늘도 즐거운 하루를 보냈다.
오후 세 시쯤 밖에 나가니 미세먼지는 옅어져 있었고 하늘은 더 짙어져 있었다. 우리는 아빠 회사 근처에 있는 공원에 가기 위해 아빠 회사에 주차를 했다. 오늘같은 날의 공원은 아무리 기다려도 만차 표지판이 치워지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양재천을 따라 걸었다. 양말을 벗고 유모차 차양 밖으로 발을 내밀었다. 발에 햇빛이 닿으니 따뜻하고 간지러웠다. 발가락을 벌려 꼬물거렸다. 바람이 발가락 사이로 들어왔다. 항상 양말에 싸여 있던 내 발은 햇빛과 바람이 처음이다.
양재천을 지나 시민의 숲으로 갔다. 시민의 숲. 멋진 이름이다. 미래의 어린이인 나는 미래의 시민이기도 하므로 유모차에 앉아 당당히 입장했다. 이미 어린이들과 어린이들을 따라 온 어른들이 많았다. 그래도 우리가 누울 매트 한 장 깔 수 있는 자리는 넉넉히 남아 있었다.
매트에 누웠다. 하늘이 보이지 않았다. 대신 이미 짙어진 녹색의 잎사귀들이 자리를 다투며 조각보처럼 펼쳐져 있었다. 엎드려서 조금 기어갔다. 수분기가 있는 흙바닥이 있었다. 손바닥으로 흙바닥을 짝 하고 내리쳤다. 흙과 작은 나뭇가지, 낙엽, 작은 돌들이 잠시 떠올랐다 내 손등 위로 떨어졌다.
배가 고파서 분유를 먹었다. 잠이 쏟아졌다. 내 눈이 까무룩 감기는 걸 확인한 엄마, 아빠가 허둥지둥 짐을 정리하고는 나를 유모차에 태운다. 매트에서 자고 싶은데, 바람소리 들으면서 자고 싶은데, 하다가 덜덜거리는 유모차에 누워 잠이 들어버렸다.
두 시간이 넘게 잤나보다. 눈을 떠보니 아직 유모차에 누워 있다. 소리를 질러 엄마, 아빠를 불렀다. 엄마가 달려왔다. 나를 안아 들어주는 엄마의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라 있었고 땀냄새가 났다. 도대체 뭘 한 거지? 아빠는 멀리에서 허리를 앞으로 굽혔다 폈다 하고 있다. 주위를 둘러보니 테니스 코트다. 아빠는 코트 여기저기에 떨어져 있는 공을 줍고 있었다. 내가 자는 동안 신나게 놀았나보다. 어쩐지 내 짐이 아닌 짐이 많더라. 배낭 밖으로 비죽 나와있던 막대기 두 개는 라켓이었구나.
그래, 어린이날이니까. 미래의 어린이도, 과거의 어린이도, 모두 신이 날 자격이 있다. 충분히.
나, 세상에 나온지 282일
안산에는 할아버지, 할머니, 이모, 삼촌, 그리고 장군이 함께 살고 있다. 장군은 사람들과 같이 살지만 사람보다는 인형을 더 닮았다. 장군은 개다.
나는 장군이 조금 두렵고 많이 좋다. 하지만 장군은 나에게 별로 관심이 없다. 장군용 의자에 앉아있는 장군과 눈을 맞춰보려 의자를 잡고 일어나 기다려도 장군은 나를 쳐다보지 않는다. 내가 말을 걸어도, 등과 귀를 만져도 시큰둥하다. 아까는 엄마와 소파에 나란히 앉아 있었는데 장군이 올라오더니 나를 밀어내고 엄마 옆자리를 차지했다. 엄마와 내 사이를 질투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장군은 엄마의 가족과 10년이 넘게 함께 살고 있다. 장군에게는 세 번째 가족이다. 첫 번째 가족의 남자 어른이 장군이라서 장군이라는 이름을 얻었다고 한다. 두 번째 가족은 장군을 아주 예뻐했지만 그 댁의 여자 어른이 큰 수술을 하는 바람에 우리 집에 맡겨졌다. 할머니가 수술을 받은 여자 어른의 친구였다. 할머니의 친구가 몸을 다 추스르고 났을 때 장군은 이미 엄마의 가족의 일원이 되어 있었다. 할머니의 친구는 다시 장군의 엄마가 되는 것을 포기하고 장군의 대모가 되기로 했다. 그렇게 장군은 엄마의 가족의 막내가 되었다고 한다.
개는 사람보다 빠르게 늙는다. 청소년이던 장군은 어느새 엄마처럼 청년이 되었고, 할머니처럼 중년이 되었고, 가족 중 가장 먼저 노년에 이르렀다. 흰 털이 많이 났고, 검던 눈동자가 회색이 되어 가고, 가슴에 있는 물혹도 점점 커지고 있다. 전용 의자에서 주로 시간을 보내고 밥도 노견용을 먹어야 한다.
그래도 여전히 산책을 나가면 신나 하고, 가족들이 돌아오면 폴짝폴짝 점프하고 배를 보이며 환대한다. 쓰다듬어주길 바라고 함께 자려 한다. 항상 함께 자던 첫째 누나가 어느 순간부터 같이 살지 않더니 어느 날부터는 나를 안고 가끔 찾아온다. 여전히 첫째 누나를 반기고 안기고 싶지만 엄마는 나를 돌보느라 여력이 없다.
나는 장군을 조금 이해할 수 있을 것도 같다.
나, 세상에 나온지 283일
겨울에 코감기 때문에 소아과에 갈 때마다 콧물흡입기로 콧물을 뺐다. 코에 관을 대고 강한 압력으로 빨아들이면 코 깊숙한 곳에 있던 콧물이 줄줄 빨려 나온다. 나는 그 과정이 너무 싫어서 병원을 아주 싫어하게 되었다. 하얀 가운을 입은 사람만 보아도 나는 울음부터 나온다. 그 때의 기억 때문인지 나는 누가 내 코를 만지는 것을 정말 정말 싫어한다. 엄마도, 아빠도 그 누구도 내 코를 쉽게 만지도록 허락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 싫은 코만짐을 하루에 한 번은 당해야 한다. 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내 코에는 코딱지가 잘 생긴다. 아주 작아 아기용 면봉이 겨우 들어가는 내 콧구멍에는 콧구멍을 거의 막을 만큼 큰 코딱지가 매일 생긴다. 엄마는 세수를 하거나 목욕을 해서 내 코딱지가 말랑해질 때를 기다린다. 코딱지를 빼는 방법은 크게 세 가지다. 콧볼을 눌러 빼거나, 손수건으로 닦아내거나, 면봉으로 꺼낸다. 나는 세 방법 중 어느 하나 편애하지 않고 전부 다 싫어한다. 그래도 엄마는 코딱지가 가득하면 숨쉬기가 어렵다며 이 과정을 기어코 매일 반복한다.
그러다 결국 사단이 났다. 오후에 엄마가 멀리 있는 도서관에서 빌린 책을 반납하러 가야 한다며 내 옷을 입혔다. 옷을 입으려면 작은 구멍에 얼굴을 넣어야 하고 팔다리도 마음대로 움직이지도 못하고 꼼짝없이 제자리에 있어야 한다. 그때부터 내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았다. 엄마는 그래도 밖에 나가려면 코딱지를 파야 한다며 면봉에 물을 묻혀 들고 왔다. 어제 목욕을 하지 않아서인지 내 양쪽 코에 코딱지가 가득 차 있었고 엄마는 그걸 빼느라 내 얼굴을 움직이지 못하게 잡았다. 나는 울면서 힘껏 고개를 돌리고 팔을 저어서 엄마를 밀어냈다. 이제 내가 많이 커서 엄마는 내 힘을 완전히 제압하지 못한다. 코딱지 씨름이 길어졌고 나는 너무 많이 울었다. 울다 보니 구역질이 났고 결국 토를 해버렸다. 곰돌이 후디와 내가 베고 있던 쿠션이 모두 젖었다. 간식으로 먹은 키위와 치즈도 모두 게워냈다. 엄마는 나한테 미안하다고 사과하며 옷을 다 벗기고 젖은 머리와 얼굴을 씻겨주었다. 먹은 것을 다 토해내서 내 배는 홀쭉해졌고 힘이 빠진 나는 잠이 들어버렸다.
일어나보니 엄마가 죽을 끓여놓았다. 사과의 마음이 담긴 죽이라고 했다. 나는 소고기와 버섯과 토마토와 양파와 당근을 넣고 참기름을 쪼로록 두른 죽을 홀쭉해진 배가 빵빵해질 때까지 받아 먹었다.
엄마가 나에게 죽을 먹이며 정말 이상한 이야기를 했다. 내가 조금만 더 크면 내 손가락을 넣어 스스로 코딱지를 파게 될 거라나. 누가 말려도 계속 팔 거라고 했다. 엄마, 내가요? 내가 내 코딱지를 팔 거라고요? 훗. 엄마의 죽은 진짜지만 이 이야기는 진짜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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